이달에 만난 사람 | 이현호 | 한미어패럴 대표

시련은 있어도 좌절은 없다

“사업이라는 것이 늘 부침이 있어요. 잘 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지요. 안된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더라고요. 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하면 잘 풀려 나가기도 합디다.” 40년 이상 봉제에 몸담아 온 등산복 제조 전문 한미어패럴 이현호 대표는 오랜 시간 많은 시련과 역경이 있었지만 결코 좌절하지는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지금껏 한우물을 파고 있지만 봉제는 늘 기회였고 때론 성공에 대한 과실이었다고 말한다. 올해 코로나 사태로 업계 전반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했지만 이 대표는 오히려 새로운 기회였다고 이야기한다.

“고어텍스 등 투습방수 원단이 사용되는 등산복 제조가 전문입니다. 등산복이나 군복 등 투습방수 제품에는 심실링기, 웰딩기 등이 사용되는데 아마 국내에서 이 기계를 가장 많이 보유한 공장이 저희가 아닐까 싶습니다. 올초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고 난 뒤 방호복 부족 사태가 생기면서 우리 공장으로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방호복에도 종류가 많은데 저희가 생산하는 심실링 처리된 제품은 봉제처리된 것보다 방호력이 높아 가장 위험한 장소에서 사용하는 제품입니다. 방호복 생산이 급해지면서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심실링기도 적지 않은 숫자였으나 급히 5대를 더 주문했고 그것도 모자라 2대를 추가로 들여왔지요. 지금 우리 공장의 1층은 당초 매장으로 사용하던 공간인데 방호복 생산이 급해 진열된 등산복 완제품을 한쪽으로 밀치고 생산라인으로 바꾼 겁니다. 매장까지 없애면서 생산라인을 급히 늘린 것은 방호복 주문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당시 의료현장의 상황이 급박해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해보자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서둘러 기계도 들여놓고 비상등을 켜고 정신없이 돌렸지요.”

코로나 덮친 봉제업계 위기, 오히려 새로운 도전 기회로

한미어패럴은 30대에 가까운 심실링기를 보유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심실링기가 더 늘어나서 한미어패럴은 이제 30대에 가까운 대수를 보유하게 되었다. 등산복이나 군복 자체 공장 물량으로는 이 정도까지 심실링기가 필요하지 않은데 수량이 많을 때는 외주공장까지 가동해야 하고 코로나로 비상상황까지 발생하다보니 심실링기가 많아진 것이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한달 정도 지난 후부터 약 3개월 간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방호복을 만들었다. 그러나 최근 질병관리본부에서 방호복 품질에 문제가 발견되면서 국내 생산에 제동이 걸렸다.

결국 랜덤검사가 전수검사로 바뀌면서 국내 생산이 일시 중단된 것이다. 방호복 생산이 중단된 것과 상관없이 다음 작업으로 군복 생산 일정이 잡혀있어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한미어패럴은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의 주택가의 2층 짜리 건물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 전체를 생산라인 겸 제품 판매 매장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뒤편의 천막형 창고에서 특이한 물건을 하나 발견했다. 요즘 흔히 “네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말이 절로 나올 법한 물건인데 바로 포클레인이다.

봉제공장에 웬 포클레인이냐고 물었다. “봉제공장에 지게차는 가끔 볼 수 있을 거예요. 원단이나 자재를 운반할 때 대부분 지게차를 사용하는데 용도가 무척 한정되어 있습니다. 지게차는 올리고 내리고 운반하는 기능 정도 밖에 없어요. 그러나 포크레인은 이 기능 외에도 더 많은 용도로 활용할 수가 있어서 공장에 한대 비치했어요. 쓰레기 포대를 버리거나 2층으로 자재 올리는데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먹는 일만큼 기계를 좋아해 만들고, 다루고, 고치고

봉제공장 용도에 맞게 포클레인을 사용하려면 몇가지 부품은 개조해야 한다. 이미 한켠에는 이 대표가 아이디어를 내고 외부에서 가공해온 포클레인 부속 장치가 놓여있다. 좌우 회전이 가능한 집게, 바가지 같은 장치인데 공장에 필요한 장치라고 설명해 준다. 기계를 무척 좋아하나보다고 이야기를 건네자 돌아오는 대답이 걸작이다. “음식 먹는 것 만큼 기계를 좋아합니다. 이 포클레인을 공장에 사용하기 위해 운전자격증까지 새로 땄어요. 기계를 다루는 거나 기계를 만들고 개조하는 것을 좋아하다보니까 본업에 매진해야 하는데 가끔 이런 것에 정신이 팔려 소홀할 때가 있어요.”

기계를 좋아하는 이대표는 국내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사이드카가 부착된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보유하고 있다. 1층 등산복 매장의 한켠에 전시품으로 진열해 놓았는데 코로나로 매장이 생산라인으로 바뀌면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맛있는 음식 만큼 기계를 사랑한다는 그는 개조하고 개발하는 데도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 기자가 찾아간 날 사무실 응접탁자에는 외부에서 가공해온 것으로 보이는 기계 부품이 한가득 놓여있었다.

최근 작업한 방호복을 포장하는 장치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방호복 포장할 때 접으면 공기가 들어가 부풀어 작업이 쉽지 않아요. 이때 무거운 금속 부품이 무게로 눌러준 후 포장비닐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장치인데 지금 거의 마무리 되었어요.” 이미 포장장치를 이용해 테스트한 제품 샘플이 탁자 옆에 놓여 있었다. 기계를 좋아하다보니 공장안에 웬만한 기계는 이대표의 손을 거쳐 가는 것이 대부분이다. 작업자가 불편함을 느끼거나 생산성에 저해되는 부분이 있으면 그의 손을 거치면 뚝딱 마무리된다.

방호복 포장기 개발 시도 샘플 생산 거의 마무리

공장안에 웬만한 기계는 이대표의 손을 거쳐 가는 것이
대부분이다.

최근에도 심실링기에 원단이 끼어 불량이 발생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자체적으로 부품을 새로 깎아 전부 갈아끼웠다. 이 장치는 기계 메이커에서 아이디어를 참고해 가기도 했다. 기계에 관한 아이디어가 매일, 매순간 새록새록 샘솟다보니 정작 본업인 봉제는 뒷전이 될 때가 많다며 웃는다. 한미어패럴은 OEM 생산을 주로 하지만 어엿한 등산복 자체 브랜드 ‘Tatra’(타트라)를 보유하고 있다. 기계에 관해 한참 이야기하다 자체브랜드 타트라에 대해 넌지시 물었다. 타트라는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우리가 주로 생산하는 등산복 재킷이나 바지, 다운 재킷, 군복은 연중 쉼 없이 생산할 수 있는 품목이 아니에요. 일년에 비수기가 몇달은 되지요. 그럼 그 많은 비수기는 어떻게 할 것이냐 곰곰히 생각해본 끝에 우리 제품을 한번 만들어 보자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래서 ‘타트라’가 탄생했어요. 등산복 전문 브랜드인데 우리는 대부분 자체 생산되는 등산 재킷, 다운 재킷, 바지를 주로 생산하고 그것만 집중해서 판매해요. 등산복 매장에 가보면 신발도 있고 모자도 있고 다양한 용품이 있는데 저희는 저희가 만든 제품만 팔아요. 구색이 다양하지 않아도 저희 매장을 찾는 손님들은 저희 제품을 고집하는 분들도 많아요. 입어보면 다른 제품과 차이가 확실히 나기 때문이지요.

저희 제품은 제가 모두 디자인하고 직접 패턴을 만들어 자체 공장에서 만든 제품이에요. 원단부터 디자인, 재단, 봉제, 완성까지 모두 저희 손을 거쳐서 만들어집니다. 일반 브랜드 제품은 디자이너가 스케치한 디자인을 모델리스트를 거치고 외주 공장을 통해 만들어지지만 저희 제품은 디자인이 마련되면 제가 직접 패턴을 뜨면서 여러 번의 수정 작업을 거쳐 완성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옷의 완성도가 훨씬 올라가고 입어보면 착용감이 좋다는 반응이 반드시 나옵니다. 타트라를 만든 후 매장을 공장에 두고 판매했는데 이후 공장을 몇번 이전한 후에도 물어물어 찾아오는 이들이 있어요. 찾아와서는 왜 소리 소문 없이 이사갔냐고 항의하기도 해요.”

장인의 손을 거친 자체 브랜드 착용감 좋아 매니아도 많아

주택가 2층 짜리 건물에 자리잡고 있는 한미어패럴은 건물 전체를 생산라인 겸 제품 판매 매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대표는 자신이 직접 만든 등산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기술적인 자부심이 있을만한 이유는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원래 그는 양복점에서 봉제를 배웠다. 양복을 배운 기술자는 웬만한 봉제는 다한다고 이야기한다. 양복으로 출발한 그가 양복점 일을 그만두게 된 것은 기성복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양복을 입던 사람들이 마치 맞춤복인듯한 기성복이 쏟아져 나오면서 양복점 일은 사양길이 되겠구나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른 일을 찾아보던 중 작은아버지가 다니던 교복업체에서 재단 패턴 파트 일을 하게 되었다. 교복을 입던 시절, 종로2가 화신백화점 자리에는 어린이백화점이라는 상가가 있었고 그곳에 2개층의 매장을 가진 ‘신생교복사’는 전국에서 최고로 알아주던 교복 전문업체였다. 지금으로 치면 교복 중 최고 브랜드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당시 교복은 전국 모든 학교가 똑같은 디자인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당시 이 교복업체가 얼마나 인기있었는지 매장에서 교복을 팔고 저녁에 현금 다발을 자루에 담아올 정도였다.

그러나 교복도 5공 시절 자율화가 시행되면서 변화가 왔다. 일률적이던 교복도 학교별로 자율화되면서 디자인도 제각각 달라졌다. 만들어 진열만 해놓으면 팔리던 시절이 지나 학교별로 다른 디자인에 맞게 만들어야 했다. 신생교복도 그 즈음 사업 방향을 바꿨다고 했다. 학교별로 디자인이 달라 수요를 맞춰 만들기도 힘들고 해서 일반인들을 상대로 한 기성복 사업으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당시 점퍼, 재킷 등을 만들었는데 수요도 감안하지 않고 대량의 제품을 만들어 재고로 창고에 쌓아두었다.

결국 이것이 신생교복의 화려했던 막을 내리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신생교복이 문을 닫고 이대표는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섰는데 운좋게도 당시 아웃도어 분야에서 승승장구하던 서울양행이란 곳에 취업이 되었다. 서울양행은 일본으로 아웃도어 제품을 수출하던 전문회사였다. 그 당시 일본 북부의 훗까이도, 삿뽀르 등지는 겨울철 스키가 활황이었고 국내에서 스키복을 비롯한 다양한 아웃도어 제품이 많이 수출되었다. 일본에 스키복을 주로 수출했던 서울양행은 최대 수출업체 중 하나였다. 그곳에서 등산복 등 아웃도어 제품에 관해 많이 배웠다고 한다.

양복으로 배운 봉제 기술 등산복 분야에서 완성

한미어패럴의 등산복 자체브랜드 ‘Tatra’(타트라)

“양복, 교복하고 아웃도어는 좀 다른데 서울양행에서 기술을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당시 일본 수출이 호황일때라 6개 봉제라인의 재단물을 책임지고 있던 저는 수출물량이 많아 다양한 제품을 접할 수 있었고 관련 기술도 풍부하게 습득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 때부터 등산복 분야에 본격 입문하게 되었지요.” 호황이던 일본 수출도 영원하지는 않았다. 국내 인건비가 오르고 전반적인 생산 비용이 상승하면서 바이어들이 다른 지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울양행 역시 수출이 줄어들면서 사세가 축소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이대표는 본격적으로 공장 설립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내 공장 한번 가져봐야겠다는 생각에 자제들의 이름 한 글자씩을 따서 ‘한미어패럴’을 차렸고 인천 지역에서 새출발을 했다. 공장은 부침이 있었다. 잘 될 때도 있었고 힘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주로 미주, 유럽 수출 물량의 등산복 등 아웃도어 의류를 만들어 수출했다. 당시만 해도 경기가 좋았다.

출중한 패턴사였던 이대표였기에 바이어에게 샘플을 만들어 보내면 최고라고 찬사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아웃도어 재킷을 수출하면서 투습방수 제품을 시작했고 그 때부터 하나 둘 관련 장비가 공장에 들어왔다. 이후 수출이 어렵게 되면서 국내 내수물량의 등산복을 주로 생산했다. 그러나 내수물량은 스타일당 수량이 적어 공장 채산성 맞추기가 쉽지 않았고 그래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갈수록 악화되는 공장 사정으로 힘겨워할 때 새로운 기회가 왔다. 거래하던 업체로부터 군용 방한복 생산 의뢰를 제의받은 것이다.

군복 생산으로 새로운 도약 심실링기 국내 최다 보유

결혼 후 항상 이대표 곁에서 봉제 인생을 함께 걸어온
부인 신은순씨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방한복 소재를 개발한 그 업체가 몇년간 수의계약을 따냈고 그 업체의 물량을 생산하게 된 것이다. 군용 방한복은 생산단가는 별로 높지 않았으나 수량이 많아 생산성이 높았다. 내수용 등산복보다 훨씬 여건이 좋았다. 지금 본사 건물로 처음 이전했을 때 빚만 지고 왔는데 군복 생산을 하면서 빚도 다 갚고 임대한 건물도 매입해 본사로 활용하고 있다.

이대표는 요즘 자체 등산복 브랜드 타트라 신제품 생산을 시작해야하는데 잠시 기계에 정신이 팔려 늦어졌다고 말한다. 신제품 만들려고 등산복 원단. 부자재 등을 잔뜩 사놓고는 아직 손도 못대고 있다며 웃는다. 방호복 생산은 한숨 고르고 있고 대기 중인 군복 생산 준비와 자체 브랜드 생산으로 앞으로 몇달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전망이다. 코로나로 모든 것이 힘들지만 그럴수록 좌절하지 말 것, 그리고 새로운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라고 강조하며 봉제업 종사자들도 함께 화이팅 하자고 말한다.

<인터뷰: 이상철 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