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 공재현 | 쉐이크(Shake) 대표

코로나와 맞장 뜨는 열혈 봉제인

동대문패션타운에 목을 매고 있는 많은 봉제소공인들의 속은 숯검정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 여파로 의류시장의 매기가 시들해졌다. 영향은 곧바로 인근 창신동 숭인동 일대 소규모 봉제공장에 전해졌다. 이들 공장은 일감이 없어 생소한 천마스크도, 방호복도 꿰매 보았지만 뜨내기 일감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해 공장은 멈춰서기 다반사다. 이렇듯 기자가 최근 둘러 본 동대문 봉제집적지의 공장 사정은 난감하기 이를데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하여 다 죽으란 법은 없다. 코로나 사태 와중에도 틈새시장을 노리며 분주히 공장을 가동해 위기를 기회로 돌려 세운 이가 있다. 바로 숙녀복 생산업체 ‘쉐이크(Shake)’를 운영하고 있는 공재현(50). 그를 만나 볼 요량으로 지난 7월 중순 쯤 첫 연락을 했다. “7월 중엔 바빠서 도저히 짬을 낼 수가 없네요. 미안합니다” 7월 말 경 다시 전화해 공장 탐방을 청했다. 그는 여전히 몸을 뺄 수가 없다며, 여름휴가로 공장이 잠시 멈추는 8월 중에 만났으면 한다고 했다. 결국 8월 13일 오후, 휴가로 텅 빈 공장에서 한가로이 공재현 대표와 마주할 수 있었다. [편집자 주]

– ‘일감 없어 죽겠다’ 아닌 ‘일감 넘쳐 바쁘다’
“코로나 영향으로 매출이 세배는 상승했다. 전년 대비해 일감이 족히 세배는 늘어났다. 코로나 발생 전인 작년 재작년에는 주로 옷을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만들어 공수해 왔다. 동대문 디오트 內 저희와 협업하고 있는 매장에서도 50% 이상을 중국에서 들여왔다. 그러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중국과의 거래에 있어 이동 제한 등 여러 난관에 봉착해 매장을 채울 물량이 부족했다. 즉, 중국서 수입해 오던 50%의 물량을 국내 생산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보니 오히려 저흰 엄청 바빠졌고 따라서 매출이 그에 비례해 상승하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도 동대문시장에는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공급되는 양이 적지 않다. 서울에서 캐드프로그램을 사용해 디자인을 만들어 이메일로 보내면 현지에서 출력해 제품을 만들어 보내오는 비대면 방식이다. 사람이 오갈 수 없어 이런 식으로 거래한다. 예를 들어 코로나 이전에 5백만원어치를 판매하던 도매상이 지금은 3백만원어치로 줄었을뿐이지 전혀 못팔고 있지는 않다. 저희는 국내 거래처와 상생하기 위해 그 틈새를 이용해 국내 생산하게 되었고 매출 상승으로 이어진 것이다.”

– 바깥에서 만들던 가격을 국내서 감당할 수 있을까
“코로나 위기 상황인지라 저희가 가격을 조금 양보했다. 물론 거래처 매장에서도 양보해 주었다. 예를 들어 블라우스, 남방의 도매시장 판매가가 19,500원에 나온다고 하면 중국에서 8,900원이면 만들어 온다. 반이 더 비싼 거다. 함께 일하는 분들에게는 공정한 댓가를 지급해주지만 제가 남는 수익을 줄이니까 남들은 일이 없을때도 저희 일을 하겠다는 공장이 많았다. 그래서 외부로 한 두팀 돌리던 것을 여섯팀, 열팀으로까지 돌리기도 했다. 내가 이익을 조금 덜 보면 그만큼 일감은 있다. 결국 좀 더 많이 만들게 되니까 그것으로 보충이 됐다. 욕심 덜 부리고 마진을 조금 줄이니 상대하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더라.”

– ‘숭인동’을 고집하는 이유는 하고많다.
“2012년 공장을 설립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쉐이크(Shake)’라는 회사명으로 이 자리를 8년째 지키고 있다. 숭인동 대로변에 위치한 건물로, 8년 전 입주해 있던 병원이 나가게 되어 3, 4층이 임대로 나와 문의했지만 건물주는 건물 버린다며 봉제공장에 임대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지층이거나 꽉 막혀 답답한 곳에 공장을 두기 싫었던 터라 탁 터진 전망이 좋아 수차례 건물주를 설득했다. 샘플생산이라든가 소량 옷을 생산하더라도 입지조건이 좋은 곳에 공장을 두고 싶었다. 그렇게 어렵게 설득 끝에 3층과 4층(아래 사진)을 임대계약해 3층은 샘플작업과 재단실, 소량생산 공간으로, 4층은 창고와 사무실로 사용하며 지금껏 이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여기선 샘플과 소량생산(150장 정도까지)만을 하고 그외 작업물량은 여섯군데 외부 하청을 보내 봉제한다. 숭인동에 터를 잡고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지근거리에 동대문패션타운이 있어 입지조건이 최상이다. 내수 봉제업을 하기엔 위치적으로 매우 편리한 지역이다. 원부자재 시장과 의류도매시장이 가깝고 소규모봉제공장이 산재해 있는 면목동, 장위동, 장안동 등이 가까와 일감 컨트롤하기에도 편리한 곳이다. 제 경우 만든 제품의 50% 정도는 도매시장 쪽으로 납품하고 50%는 일본으로 보내다 보니까, 재빨리 샘플 만들어 금방 보낼 수 있고 또 외국바이어들이 오더라도 곧바로 샘플을 제시할 수 있는 기동성과 업무효율성이 뛰어난 이곳 숭인동을 떠날 수가 없을 것 같다.”

– 옷과의 첫 인연, 그리고 뼈아픈 외도(?)
“새로운 천년의 시작인 2000년, 서른나이에 의류와 첫 연이 닿았다. 전자상거래에 입문, 인터넷쇼핑몰을 통해 의류판매를 시작했다. 남들보다 빨리 인터넷쇼핑몰에 눈을 뜬 거다. 아내가 특별히 디자인을 전공한 건 아니지만 의류에 관심이 많아 의류도매시장에서 옷을 떼어와 인터넷에 올려 팔아보자고 했다. 결혼한지 2년, 이렇다할 일을 하는게 없었던 터라 덥석 물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대박이 났다. 당시 2년 만에 30억원 가까이 벌여들였다. 쇼핑몰 MD 만나 제품코드를 따오고, 입점할 수 있게끔 DB관리와 고객관리를 하고, 영업하며 포장하는 직원, 웹마스터, 프로그래머 등 직원도 10명으로 불어났다. 거기까지였다.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큰 돈을 거머쥔 게 화근이었다. 때마침 지인이 솔깃한 청을 해왔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같이 해보자고 했다. 두둑해진 지갑에 반비례해 귀는 잔뜩 얇아졌던 모양이다. 냉큼 의기투합했다. 옷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돈을 몽땅 들고서 강남으로 가 논현동에 사무실을 번듯하게 냈다. 이 계통을 잘 안다는 K실장을 영입해 일선에 투입했다. K실장이 필요하다 하면 용처도 잘 알지 못하면서도 비용을 지출했다. 나는 명의만 대표였지, 실제 외부에선 K실장을 회사 대표로 알고 있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K실장은 내 돈을 이용해 엔터테인먼트 세계에 홀로서기 발판을 다져가고 있었다. 나쁘게 보자면 일종의 사기다. 결국 회사는 어려워져 만세를 부르고 말았다. 모든 걸 잃고 사무실이 있던 강남구 논현동에서 동대문까지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걸었다. 신사동을 벗어나 한남대교를 건너 약수동을 향할 때 다리 난간에서 한순간 극단적 선택을 떠올리기도 했었다. 그만큼 모든게 절망적이었고 힘들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K실장은 엔터테인먼트사를 따로 설립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대외 영업을 관장했었기에 모든 오더는 고스란히 그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그 회사는 지금도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잘 나가고 있다. 물론 소통은 전혀 없다.”

서울봉제산업협회 창립 멤버이기도 한 공대표(원 안)는 청년디자이너들의 취창업 지원에도 늘 힘을 보태고 있다,

– 먼 길 돌아 다시 의류를 보듬다
“회사 문을 닫고 충격으로 한 3년 간을 허송세월로 보냈다. 한순간에 재산의 90%를 날려버렸으니. 그런 과정에서 아내는 아이 키우며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바쁘고 힘든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아내와 4개월 정도 떨어져 지내기도 하면서 내 나름대로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이 사건은 독하게 마음을 먹고 각오를 단단히 하게 한 계기가 됐다. 다시 의류 쪽으로 돌아왔다. 2000년 초 했던 전자상거래 의류쇼핑몰에서 벗어나 아예 옷을 만드는 일에 도전했다. 전에 하던 전자상거래에 대한 미련은 버렸다. 너무 난립되어 있는데다가 감을 잊어버렸다고나 할까, 지금 열심히 하고 있는 젊은 친구들의 능력이 10이라면 나는 2밖에 안된다. 감각이나 노하우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제 좀더 감이 좋은 친구들에게 맡기고 OEM방식의 단순 하청으로 제작 의뢰를 받아 납품하며 옷에 관한 공부를 제대로 해보기로 마음 다잡았다.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자하는 일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겠는다는 걸 깨달았다. 패턴에 관한 스킬도 익히며 생산 공장도 찾아가 생산 공정도 파악하고 통합적 관리기술도 익혔다. 이후 ODM방식으로 생산 출고해 일본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일본에 거주하는 지인을 통해 신쥬쿠와 큐슈 쪽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브랜드의 일감을 받아 생산, 수출을 했다. 일본 사입자가 저희한테 작업을 의뢰를 하면, 경우에 따라 저희 자체 디자인으로 샘플을 만들어 보내기도 했다. 자기네들도 디자인이 있으면 우리에게 제시해 생산을 요청하기도 했다. 다시말해 OEM과 ODM을 병행했다. 주품목은 80% 정도가 블라우스와 스커트이고 남성용 셔츠와 남방도 만들었다. 유니섹스 스타일이 주였다. 더러 액세서리 주문도 들어오는데 아무튼 남녀 의류를 망라해 거래하고 있다.”

– 社名 ‘쉐이크’에 담긴 의미는?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며 회사명을 떠올리다 모든게 차고 넘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Shake란 단어를 떠올렸다. 흘러넘친다는 뜻이다. 재기를 꿈꾸며 뭐랄까, 일감도, 사람도, 돈도 모든 게 흘러넘쳤으면 싶은 마음에 Shake로 낙점했다. ‘○○어패럴, △△섬유 처럼 업태는 드러나지 않아도 저만의 의미를 갈무리하고 싶었다.”

– 매출 대비, 매입 자료가 부족하다?
“제 주위에 봉제소공인분들이 많이 계신다. 저처럼 ODM방식이면 세금문제로 인한 고민이 덜 하지만, OEM방식으로 단순 하청하시는 분들이라 자료를 맞출 수가 없어 늘 걱정이다. 세금계산서는 100% 다 끊어줘야 하는데 객공이나 하청하시는 분들 대부분이 사업자등록이 안되어 있다. 재하청하시는 분들 중 사업자등록을 한 분들은 아마도 5%정도 밖에 안될 것이다. 임가공만 하는 소공인들의 자료가 몽땅 소득으로 다 잡혀 버린다. 예를 들어 매출이 1억이라면 1억에 대한 소득이 다 잡혀버리니까, 임대료를 빼거나 부자재 구매비용을 넣더라도 그렇게까지 맞출 수가 없다. 단순 임가공에 대해 전부 소득으로 잡아 세금을 내야하는 게 문제다. 그런다고 객공이나 하청하는 분들한테 그만큼을 다 떼고 내라 할 수는 없다. 그렇게 세금공제한다고 하면 누가 일을 받아 하겠나, 나도 봉제협회 일을 도와 7년 전부터 사업자등록 안한 이 일대 봉제소공인들을 찾아다니며 사업자등록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 결과 시장 도매상들은 좋아졌지만 정작 공장하는 분들에게 돌아오는 세제 혜택은 알량했다. 물론 사업자등록을 함으로써 작업환경개선, 클린사업 등 소소한 지원 혜택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매출 대비, 매입 자료가 부족한 소규모 봉제공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이 세제적인 혜택을 볼 수 있게 제도가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청년 디자이너들의 꿈을 지원하다.
“저희는 또 단순 하청이 아니다 보니까 청년 디자이너, 대학 관련 학과 학생들이 찾아와 작업을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 일찌감치 청년들과 협업을 하게 된 이유다. 이들이 SNS 등을 통해 자신들만의 물건을 만들어 판매할 수 있게끔 소량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더불어 저희 제품도 그들만의 창구를 통해 판매하기도 한다. 또한 이들과 플랫폼을 구축해 클라우드펀딩도 진행했다. 이들이 플랫폼을 잘 구축해오면 후생산 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대량 위주로 제품을 만들어 거래처에 납품하고 있는 저희 입장에서 보면 양은 적지만 의류를 사랑하는 청년들의 앞날을 위해 기꺼이 함께 한다. 모든 게 그러하지만 옷 역시 배워도 끝이 없는 거 같다. 20년 전 유행했던 옷을 지금에 맞게끔 디자인 변형해서 컨셉을 잡기가 쉽지는 않은데 그래도 20년 전 젊은 감각을 끄집어 내어 지금의 새로운 패턴과 접목을 시켜서 소비자한테 다가갈 수 있는 것은, 감을 유지하며 새로운 감각을 키우려면 청년들과 어울릴 수 있어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 부산 거점 벗어나 서울 ‘쉐이크’로 일원화
“2009년, 부산에 먼저 거점을 마련한 후 2012년 서울 숭인동에 터를 잡았다. 당시 서울에서의 생산은 단가가 높아 부산에서 먼저 시작하게 되었다. 서울서 봉제했을 경우에 부산보다 1/3정도 임가공비가 높았다. 퀼리티도 부산이 좀 더 높고 마무리가 깔끔했다. 부산은 ‘와이엠’이라 사명으로 동생이 맡아 운영하고 현재는 수출업무만 진행하고 있다. 현재도 제가 ‘와이엠’의 대표직을 유지하고 있으나 앞으로는 모든 작업 진행을 서울로 일원화할 계획이다.”

– 천마스크나 방호복, 반짝 일감은 사양
“코로나가 확산되던 2월초, 3월 사이 보름 정도, 잠시 공장을 스톱시켰다. 물론 그 공백기간에 천마스크나 방호복 등을 생산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었다. 하지만 내가 제일 잘 하는게 셔츠, 블라우스 등 의류라서 이 외의 것은 하고 싶지가 않았다. 물론 임시 방편으로 할 수는 있었겠으나 2주 공백기간을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시대의 도래를 예상하면서 나름대로 머릿 속을 정리하며 보냈다. 앞으로 의류 유통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급속하게 재편될 것이다. 언택트시대 인터넷 상거래 활성화로 더욱 온라인에서 제품이 많이 팔릴 것이란 생각에 거래처 대표와 머리를 맞대고서 타겟을 인터넷 전자상거래 쪽에 두고서 봄상품 개발 준비에 매진키로 조율했다. 공장이 스톱된 보름 간을 천마스크나 방호복 일감을 사양하고 사업구상과 봄상품 개발로 옹골지게 이용한 셈이다.”

– 봉제소공장에 대한 관심과 바람
“동대문 봉제집적지로 통하는 종로구 창신동, 숭인동, 보문동 일대 봉제소공장들은 클린사업과 작업장환경개선사업의 결과로 작업환경이 많이 좋아졌다. 예를 들어 자동 연단기 지원으로 작업자의 근골격계 질환 발생 우려를 덜어주었고, 분진흡입기 지원으로 먼지 날리지 않는 작업장이 되었다. 좀 더 바람이 있다면 앞으로 노후화 된 기계를 교체하는 비용도 지원 대상에 포함시켜주면 코로나로 어려움에 처한 봉제기계 공급업체와 봉제소공인들에게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인터뷰: 차세호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