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춘섭 칼럼 | 어디서 고래고래 소리 지를 수 있으랴

ghlwkdsla100구름 같은 사람들 속을 뚫고 지하철 입구에서 밖을 나오니 바로 넓다란 광장이다. 오징어나 꼬치구이를 굽는 연기가 자욱하다. 거기에 암표상들이 먹이 찾는 고기떼 몰리듯 “입장권 사세요.” 하는가 하면 “입장권 파세요” 하는 무리들도 있다. 경기 시작 한 시간도 안 남은 이 시각이 그들에겐 황금 타임일 터-. 전쟁을 방불케 한다.
운동 경기 관람을 한지 10년도 넘었으니 운동장 밖 풍경이 신기하기만 하다. 운동장 안에서는 북 치고 꽹과리 치고, 그런가 하면 부부젤라 소리까지 요란하게 마이크를 타고 밖에까지 들려오니 공연히 마음을 설레게 한다.

한동안 넋을 잃고 운동장 밖의 시장터 같은 분위기를 음미하며 우왕좌왕하는데 한 무리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다. 옳거니 입장을 위한 줄이구나 하면서 열을 서는데 갑자기 입장권을 구입하지 않은 것이 생각난다. B군에게 그걸 이야기 하니 그가 잽싸게 뛰어간다. 인터넷으로 표를 예매했기 때문에 미처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B군이 10여분 만에 입장권을 들고 왔으나 길게 늘어선 열은 줄어들 생각이 없다.

수만 명을 입장시키면서 한 곳만을 입구로 했으니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거의 30여 분이 지나 입구 근처에 다다랐는데 알고 보니 소지품 검사 때문이었다. 주로 확인하는 것이 소주 등 술 이었는데 우리가 챙겨간 것은 맥주랑 옥수수 몇 자루라 쉽게 통과했다.
넓은 구장을 거의 반 바퀴 이상 휘돌아 정해진 게이트에 들어서니 어두웠던 바깥과는 완전 별세계다. 휘황한 조명 불빛이 경기장 전체, 바닥의 푸른 잔디밭에서 관중석을 지나 구장의 천정까지 그야말로 불야성이다.

잔디밭에서는 마침 한국 의장대가 북과 꽹과리, 피리 등을 불며 흥을 돋우고 있다. 그들의 복장은 노란색 두루마기에 모자 색까지 노란색으로 통일하여 녹색 잔디밭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본부석 쪽에서는 우측 골대 뒤로 중국 측 응원단이, 좌측 골문 뒤에는 한국 측 응원단이 붉은색 티셔츠를 입고 앉아 있다. 이에 반해 중국 측 응원팀은 노란색 티셔츠 차림이다.
지난 9월 초 월드컵 경기장에서 있었던 한·중 축구 2018년 월드컵 예선전 모습이다.

중국은 그동안 한국에 압도적으로 패하는 바람에 한국 공한증(恐韓症)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기필코 승리해서 그동안의 설움을 씻겨 내겠다는 다부진 각오로 한국에 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시진핑’은 ‘축구굴기’의 기치를 내걸었고 수백억 원씩 주고 외국선수까지 영입해서 이번엔 무언가 보여 주겠다고 한국에 온 것이다.

뿐인가, 이를 증명하듯 중국 응원단 1만 5,000명이 오겠다고 표를 이미 예약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한국을 여행하는 유커들과 한국에 유학 온 수천 명의 학생까지 동원 최소 3만 명 이상의 응원단을 꾸리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던 것이다. 필자가 이번 경기를 관람하겠다고 용기를 낸 데는 그들의 그런 요란법석이 적지 않은 애국심을 환기시켰기 때문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중국 응원단은 수만 명이 모두 노란 티셔츠를 입고 한국 같은 일사불란한 응원 보다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군중의 모습들을 일별하니 역시 한국 응원팀이 압도적이었다. 월드컵 축구장이란 홈그라운드라는 잇점을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오! 필승코리아” 거기다 “아리랑” 가락이 축구장을 들썩이게 하는데 그 가락이 아리랑 가락임에 분명하지만 리듬이 빠르고 박력있게 불러, 밀양 아리랑이나 정선 아리랑처럼 늘어지고 구성진 분위기가 전연 없다. 좌석에 앉기 무섭게 거대한 태극기가 관중들 머리 위로 출렁거리며 다가온다. 텔레비전에서 가끔 보던 그 태극기 이동인데 막상 머리 위로 지나가는 태극기를 대하니 공황장애를 일으킬 수준이다. 필자 머리 위를 지나가는데 족히 3분은 걸릴 정도이니 태극기의 크기를 어림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시합엔 한국응원단들이 특별 소품을 들고 나왔는데 그것은 신문지 크기의 태극기였다. 이걸 사회자의 합창에 따라 두 손으로 펼쳐드니 관중은 일시에 없어지고 흰 바탕의 태극기만 축구장을 에워싼다. 하나의 장관이었다.
시합은 시작한 지 이미 한 참되었는데 필자는 축구경기보다는 각 팀의 응원 모습에 정신을 뺏기고 있었다. 3대 0으로 패색이 짙어 조용하던 중국 응원석이 갑자기 응원 열기가 해일처럼 일어난다. 십여 분도 안 되어 중국이 두골을 만회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롱즈다이’(龍之隊)라는 주력 응원팀은 열렬히 파도타기를 하며 “짜유~ 짜유~”를 연호한다. 그게 무슨 뜻인가 알아보니 加油, 즉 기름을 붓는다는 뜻의 ‘파이팅’이란 뜻이었다.
결국 스코어는 3대 2로 한국이 승리했다. 3대 0으로 끝낼 수 있었던 경기를 순간의 방심으로 두 골을 내준 것이 아쉬웠지만 우리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젊음의 발산이란 점에서, 옆 사람 눈치 볼 것 없이 소리소리 마음껏 질러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점에서 스포츠 관람은 돈이 아깝지 않은 일상의 탈출인 것 같다.

가끔 교향안단의 연주회 같은 곳이나 성악가나 바이올린, 피아노 같은 음악 연주회에 가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옆 사람과 대화 한마디 못하고 있다가 연주가 끝났을 때 손바닥 아플 정도로 박수치는 건 정말 고역 아닌 고역이다. 그에 비하면 맑은 야외 공기를 마시며, 맥주 한두 잔에 안주까지 곁들이며 고래고래 소리까지 지를 수 있으니 운동장의 열기는 곧 젊음의 호흡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