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에 만난 사람 | 남경식 | 엔젤상사 대표

“변방에서 봉제 사수하며 장병들을 품겠습니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의 한 이면도로에 차를 멈춰 세웠다. ‘목적지입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내비게이션이 카랑한 톤으로 임무 종결을 알렸다. 주변을 살폈다. 도로 모퉁이에 들어선 자줏빛 4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벽면에 나붙은 ‘사원모집’ 안내문이 기자에게 “바로 찾아 왔소”라고 사인을 보내는 듯. 서울을 출발한지 2시간 30분, 약속시간에 맞춰 건물로 들어섰다. 계단을 올라 2층 공장 문을 빼꼼히 열었다. 생동감 넘치는 재봉기음이 문밖으로 새어나왔다. “대표님 뵈러 왔는데 사무실이 어디죠?” “3층에 있습니다” 막 3층 공장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데 계단을 오르는 인기척을 느꼈다. “봉제 잡지사에서 오셨죠?”라며 환하게 반기는 이 사람, 군복류를 생산하는 ‘엔젤상사’ 남경식 대표다. 남경식 대표는 3층 공장 한 켠에 자리한 사무실로 기자를 안내했다. 벽걸이 메모판에는 전투복 상하의 공정분석도가, 벽면엔 전투복 샘플이 걸려 있다. 설명이 없어도 군복류가 주생산품목임을 쉬 알 수 있겠다. 두리번거리다가 시선이 멎은 곳은 서가. 서가 맨 윗단에 본지(봉제기술)가 연월별로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본지가 발행한 ‘봉제대백과전서’와 ‘봉제기계총람’까지…남 대표는 본지 열혈 애독자였던 것.

크고 작은 봉제공장을 드나들며 다양한 아이템을 접하게 되지만 군복류 생산공장은 꽤나 오랜만이다. 대다수 군복류 제조업체들이 아이템의 특성 상 생산현장의 외부 공개를 꺼리기 때문이다. 이곳 또한 원청사와의 관계를 고려, 지역 봉제공장 탐방 형식으로 가볍게 소개키로 했다. 충북 청주가 고향인 그는 학교에서 ‘기계’를 전공으로 공부한 뒤 1988년 군 제대 후 대구 소재 섬유업체에 입사했다. 다후다(Taffeta), 타스란(Taslan) 등 폴리 쪽을 제직하는 회사였다.

“당시만해도 일종의 지역 텃세랄까, 출향해 타지에서 일하기가 힘들었어요. 대구공고 등에서 실습생을 받아 일 할땐데, 이들 학교 선배들이 주변 섬유 관련 업체에 포진하고 있어 실컷 가르쳐 놓으면 선배들이 데리고 가버립니다. 제가 일하던 곳은 초기에 직기 40대 정도 돌아갈 때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20대가 증설되니 보조해 주던 실습생은 그런 식으로 빠져 나가고, 혼자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죠. 그때부터 고향인 청주로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엔젤상사 전경

그렇게 대구 섬유업체 관리직을 그만두고 1998년, 청주로 돌아와 지인이 운영하는 봉제업체에서 관리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의 마수는 그가 도와주던 이 업체에까지 뻗쳤다. 결국 회사는 풍비박산 나고 사장은 야반도주해 버렸다. “당시 공장 전반을 관리하던 입장이라 직원 모두가 저만 쳐다 보더군요.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죠. 그렇게 얼떨결에 봉제공장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IMF 외환위기 시작 때 봉제에 첫 발

1990년대 중반, 중국의 저가 직물 대량 유입으로 대구 섬유업계가 휘청거렸고, 1998년 IMF 외환위기로 또 한방 결정타를 얻어 맞으면서 대구경북의 직조회사 절반이 문을 닫는 등 위기감이 번질 무렵, 남경식 대표는 떠밀리듯 봉제업에 발을 담갔다. 덜컥 봉제공장은 시작했으나 봉제용어도 낯설었다. 품목별 작업공정도, 공정에 따른 재봉기의 용도나 원부자재에 대한 기초상식도 전무했다. 아무튼 모르는게 너무 많았다. 심지어 견적도 제대로 못내다보니 실컷 작업해 주고도 손실을 보는 경우가 잦았다. 무엇보다도 봉제공장 숫자가 미미한 청주라는 지역적 핸디캡 극복도 과제였다. 이 모두를 몸으로 때워가며 시행착오를 줄여가야 했다. 서울이든 타 지역이든 일감이 있다하면 먼거리 마다않고 뻔질나게 발품을 팔았다. 재봉기 13대로 조그맣게 시작한 공장에 조금씩 일감이 늘어나고 노하우가 쌓이면서 차츰 규모도 늘려갔다.

“IMF 이후 한동안은 수출봉제 경기가 괜찮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IMF 여파가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수출길이 막히고 나니까 오더가 급감하더군요. 당시 미주 수출용 우븐류를 작업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내수 봉제로 전환해서 동대문시장 제품을 만들어 납품했습니다. 그러나 납품 후 결제 때가 되면 연락이 끊기거나 문 닫고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죠. 그때가 봉제업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이후 용케도 군납의류와 연이 닿아 지금껏 거의 군복류 생산에 매달려 있지요.”

그의 노트북 데스크탑에는 생산관리 데이터가 담긴 홀더가 잘 정리되어 있다. 잠시 양해를 얻어 홀더 하나를 열어 봤다. ‘특전사 방한복 외피상의 1팀’이라 표시된 홀더다. 여기엔 작업 연월일부터 작업 차수, 일감 호칭, 수량, 작업 세부공정 등을 양식화해 수시로 업데이트 할 수 있게 해뒀다. 수기로 정리하던 것을 컴퓨터 안으로 끌고 들어 온 것이다. 물론 아주 초기 단계의 정리이긴 하나 이 모두를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남 대표 스스로 체계화해가고 있었다. 노트북을 집으로도 가져가 공정분석 등을 그때그때 정리하는 열혈 봉제인이다. “봉제자동화 구축과 함께 요즘 대세라는 스마트팩토리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관련하여 별도로 컨설팅을 받아 본 적은 없어요. 봉제자동화를 위해선 서울에 있는 자동화장치 개발자의 도움을 받아가며 그때그때 한가지씩 해결해가는 정도입니다.”

그는 그간 진행해 온 봉제자동화의 결과물이라며 여러 봉제 영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지금 자신이 컴퓨터에 정리해가고 있는 생산관리와 관련된 다양한 데이터들은 추후 생산현장과 연결해 실시간 쌍방 소통하는 이른바 스마트팩토리의 기초 자료로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쯤에서 생산현장이 궁금해졌다. 현장을 둘러보며 설명을 부탁했다. 사무실과 붙어 있는 3층 공간에는 특종 재봉기들로 가득한데 작업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근래들어 일감이 많이 준 탓에 3층은 잠시 비워두고 2층 작업장으로 내려 갔죠. 많을 땐 50명이던 인원이 지금은 25명 수준입니다. 물론 봉제 자동화의 영향도 있지만 지방이라 숙련 인력 유입이 쉽지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지그

남 대표는 심실링기를 비롯 각종 특수 재봉기를 소개하며 특히 ‘지그(Jig)’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전투복은 공정이 상당히 많아요. 그런 반면 디자인의 변화는 거의 없는 편이지요. 일감이 투입되면 컴퓨터에 접속해서 전에 작업하며 문제가 생겼던 부분이랄지 보완해야 할 점을 체크해 놓은 기록들을 살펴 봅니다. 재단물이 들어오면 사용했던 지그 중 재사용 가능한 지그를 찾아 재봉기에 걸어줍니다. 지그 관리만 잘해도 일감 투입때마다 패턴을 비롯 다시 손 볼 것들이 줄어들지요. 작업자들도 이 모두를 다 이해하고 숙지하고 있습니다.”

전투복은 동하복 2종류로 이루어져 있다. 동복은 폴리/면 혼방이고 하복은 폴리/레이온 혼방이 일반적이다. 보통 전투복에 쓰이는 소재는 면,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정도다. 새롭게 품질개선된 동계 및 하계 전투복은 원사 자체에 항균, 흡한속건성 등 다양한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제직된 원단은 전처리, 연속염색, 날염, 후가공, SF, 검사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봉제공장에 입고된다. 오랜 군복 생산의 경험과 기술력을 지닌 ‘엔젤상사’의 숙련된 작업자들이 자동화장치가 부착된 특종 재봉기를 다루는 열기 가득한 작업현장을 둘러봤다. 전투복 기준 월 1만 5천~2만 장 생산한다고 했다. 신축성과 유연성 그리고 착용감과 활동성이 뛰어난 전투복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군복 생산 비수기는 6~9월

“군복 입찰은 보통 7월부터 시작해서 8월, 9월에 거의 다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입찰이 끝나면 바로 생산에 들어가게되는데 보통 5월 말이면 작업이 끝납니다. 이후 6, 7, 8, 9월이 비수기가 되는 거죠. 즉 입찰하는 시기가 작업 비수기인 셈입니다. 군복 비수기땐 교복 입찰에 참여해 납품하기도 합니다. 군납 직접 수주를 위해 직접생산확인증명서, 공장등록증 등 입찰 참여에 필요한 제반 조건은 다 갖추고 있고 실력도 있으나 문제는 지금껏 하청만 받아 작업하다보니 실적이 없다는 겁니다. 저희가 생산했던 군복류는 엄청 다양하고 많은데도 실적으로 인정을 못받으니 어쩔 수가 없어요. 실적을 만들기 위해서 학교 교복 입찰에 직접 참여하는 거죠. 이렇게 어느 정도 실적을 쌓아 군복 직접 수주 기회를 만들어 가야겠지요.”

남 대표는 시장제품이 아닌 군복류 생산이라, 봉제인프라가 잘 갖춰진 서울이 아니어도 큰 불편은 없다고 했다. 다만 몇 안되는 청주소재 봉제업체들이 하나둘씩 접고 있어 씁쓸하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도 가공임 자체는 그대로인데 최저임금은 갈수록 부담스럽다고 했다. 소규모 봉제공장들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구조란 얘기다. “한때 청주에도 24개 회원사를 둔 ‘청주봉제산업협회’가 있었죠. 제가 총무를 맡아 활동했는데 상당히 활발하게 움직였어요. 지금은 아마 70%는 사라졌을 겁니다. 그때만해도 회원사들이 모여 한 목소리도 내고 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구심점 조차 없어 봉제소공인 지원 사업이나 작업환경개선 사업 등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공장 탐방을 마친 뒤 남 대표와 함께 인근에 있는 상당산성 유원지 내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남 대표의 아내가 운영하는 상당산성 맛집이다. 봉제업을 해오면서 어려운 고비가 닥칠 때마다 여러 모로 힘이 되어준 아내라고 소개했다. “여태 고향 청주를 지키며 봉제업을 이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내조의 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1998년 회사설립 시 사명은 ‘우진실업’이었다. 2002년에 이르러 사명을 ‘엔젤상사’로 바꿨다. 왜 바꿨는지 물었다. 일감없어 답답하던 차에 회사 이름을 바꿔보면 좀 나아질까 하는 마음에서였다고 답했다. 아니, “묵묵히 내조해 온 ‘천사’같은 아내를 생각하며 ‘우진’을 ‘엔젤’로 바꿨다”란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