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LA에 둥지를 튼지 어언 38년째다. ‘빠다’ 냄새가 날만도 한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잔잔한 미소가 매력인 그의 모습에서 구수한 된장 냄새가 느껴진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재봉기를 비롯 봉제주변기기, 부품 등을 공급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 ABC SEWING MACHINE INC.의 박순구(William Park) 사장을 서울에서 만났다. LA 한인사회 특히 의류 봉제업계에서 그의 존재감은 높다. 한때 LA 내 한인이 운영하는 크고 작은 봉제공장 숫자가 1천 5백여 개에 달했다. 이들을 고객으로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지금은 고기능으로 무장된 서비스팀과 함께 LA내에서 봉제기기 및 부품 확보 면에서 가장 규모있는 회사로 성장했다. <편집자주>
– ‘ABC’라는 社名은?
“처음엔 ‘Couple Sewing’이라 했어요. 이국 땅 LA에서 겪었던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혼자가 아니다. 함께 할 고객이 있다’ 그런 의미로 이름 붙였는데 현지인들과 얘기하다보니 느낌이 팍 와닿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좋은 이름을 찾다가 기초 또는 기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ABC’를 떠올렸고 여기에 ‘Always Best Company(항상 최고를 지향하는 회사)’라는 뜻을 부여한 것입니다. 가끔 회사 전화를 받으면 ‘어디요?’라고 되묻습니다. ‘ABC입니다’라고 하면 방송사 ABC로 전화를 잘못 건지 알고 곧바로 끊는 사람도 더러 있지요.ㅎㅎ”
그가 봉제기기와 연을 맺게 된 것은 1972년 ‘부라더상사(現, 유니콘미싱공업)’에 입사하면서부터다. 그 당시, 부라더는 타이프라이터 비즈니스를 위해 팀을 구성하고 있었다.
부라더 측은 종로에 있던 ‘공병우 타자기 연구소’에 근무하며 타이프라이터계에 마일리지가 있는 김某 부장과 함께 젊은 청년 박순구를 스카웃했다.
부라더가, 재봉기가 아닌 사무용기기에 대한 첫 관심을 보일 때였다. 서울 중구 을지로 4가 부라더 매장 3층에 신설된 타이프라이터 부서로 자리를 옮겨 앉은 박순구는 영문 타자기를 수입해다가 한글 타자기로 개조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채 2년도 못돼 그 사업을 접었다. 완전히 접은 게 아니라 한글로 개조해 생산하지 않고 그냥 수입해서 판매키로 한 것이다.
“왜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답이 나왔어요. 그때 미싱에서 벌어 들이는 수입과 타자기를 개조해 예상되는 수입을 비교하니 타자기 개조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개조해 생산하는 부서를 싹 없애다보니 자연히 나를 포함, 개조 기술자들이 필요없게 되어 뿔뿔이 헤어졌지만 나는 ‘미싱을 좀 배워 보는게 어떠냐’는 부장의 권유로 미싱기술파트에 남게 되었지요. 김某 부장이 제 인생진로를 완전히 바꿔준 셈이죠.”
그렇게 부라더에 근무하면서 그는 한편으로 미국 이민의 꿈을 키웠다. IBM 타이프라이터 취업증을 받아 이민을 계획 중이었다. 이를 눈치 챈 김某 부장이 ‘LA에서 미싱가게하는 분이 기술자가 필요하다는데 너가 가서 한번 만나볼래?’라고 했다. 답을 미뤘다. 우여곡절 끝에 6년 회사생활을 접고서 1978년,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총각이었기에 결정과 선택도 그만큼 빨랐다.
IBM 타이프라이터社가 있는 켄터키로 날아갔다. 그러나 LA미싱가게 사장의 끈질긴 구애(?)는 계속됐다. 결국 2주만에 LA로 옮겨와 그로부터 2년 동안 그 미싱가게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그렇게 익힌 재봉기 기술을 바탕으로 1980년 독립해 지금에 이른 것이다.
“내가 비지니스를 시작했던 80년도에 한인 미싱가게는 세곳 밖에 없었어요. 지금 있는 곳은 모두 저희보다 후발업체입니다. 먼저 있던 세곳은 이 분야 전문성이 있어 비지니스를 한 게 아닙니다. 우스개 소리로 6~70년대에 이민 목적으로 공항에 내리면 누가 픽업 나오느냐에 따라 직업이 정해진다 했습니다. 예를 들어 페이트칠 하던 분이 픽업해가면 자연스레 페이트칠 하는 직업으로 흘러들게 되고 재봉기를 만지는 사람이 픽업하면 재봉기 수리 일을 하게 되던 그런 시절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