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작업으로 전환할까 싶어 뭘 좀 알아보고자 전화했는데요~” 지난달 초 사무실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발신인은 (주)진모어패럴, 양승국 대표. 내용인 즉 이렇다. “30년 넘게 봉제공장을 운영해오며 숱한 고비도 많았지만 슬기롭게 잘 헤쳐와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은 서울 마천동에서 트레이닝복을 임가공하고 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작업량이 줄어 고민이다. 이참에 공장을 부분작업 전문 공장으로 전환할까 생각 중이다.”라며 이를 봉제공장주들께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 방법을 물어왔다. 국내 봉제생산 환경이 어려운 지금, 자가 건물 2, 3층에 재단, 봉제, 완성실을 제대로 갖추고 필요인원을 채워 공장을 꾸려가는 것 자체가 뉴스인지라 직접 공장을 방문해 보겠다고 자청했다.
공장건물은 주위에서 돋보일만큼 번듯했다. 건물 뒷문쪽 주차장에서 출고 대기 중인 제품 카톤박스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유리문을 밀치자,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3층 건물인데 말이다. 계단을 이용해 3층 사무실로 들어섰다. 체크 남방 위에 트레이닝복을 걸친 양승국 대표가 반가이 기자를 맞았다. 그가 처음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곳은 ‘삼도물산’ 양평동 공장이다. 그곳에서 스웨터기기 보전업무를 맡아 일했다. 이후 구로동과 전농동의 스웨터 업체, 그리고 니트셔츠 전문인 의정부 호원동 ‘새한섬유’를 거쳐 을지로 6가 ‘평화미싱’에서 미싱기사로도 일하는 등 두루 경험을 쌓은뒤 다시 아디다스 제품을 생산하는 봉제공장으로 들어가 생산업무를 맡다가 직접봉제공장을 운영해 보기로 결심했다.
1986년 1월, 30평 규모로 조그맣게 수출봉제를 시작했다. 88 올림픽을 치루고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수출봉제에 빨간불이 켜졌다. 당시만해도 오더 걱정보다 인력 어려움이 더 컸다. 의료보험을 비롯 사업주한테 이것저것 부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공장을 하고 있던 강동구 성내동이 살기가 좀 나은 곳이라 그런지 공장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버티기가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95년도에 봉제공장을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갖게 됐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꿨다. 인력구하기가 나은 곳으로 옮겨 보기로 했다. 그렇게 주변 지역을 물색하던 중 96년도에 송파구 마천동 시장 인근에 100평 공간을 얻어 둥지를 틀었다. 그러다가 97년말 IMF 외환위기를 맞았다. 내수봉제 하던 공장들은 월급도 다운시켜야 할 만큼 힘든 시기였지만 우리는 수출 일을 하던 때라 IMF는 오히려 호기였다. 일감은 많아지고 환율은 올라 가격이 좋아졌다.

열심히 박아 실어내면 환차익이 엄청 생기다 보니 자연 오더도 넘쳐났고 내수봉제에서 빠져나온 인원들이 많아 인력난도 자연스레 해소됐다. 86년 초기, 성내동에서 시작할 때는 주로 ‘최신물산’에서 오더를 받았으나 IMF 이후 GAP의 Banana Republic(바나나리퍼블릭) 바이어를 만났다. 무역부는 ‘경승무역’이었다. 무역부에서 “공장을 키워라. 바나나리퍼블릭에서 원하는 완벽한 본 공장으로 기능을 할 수 있게 자금도 지원해 주겠다”고 했다. 마침 인근에서 내수 신사복 공장을 하던 업체가 IMF로 부도가 나 그 공장을 점 찍었다. 그러나 건물주와는 이야기가 다 되었는데 부도난 공장이 짐을 빼지 않아 근 1년 이상 기다려 99년 7월에야 이전했다. 230평 규모로 작업공간을 넓혀간 것이다. 인원 역시 100여 명으로 늘렸다.
공장 이벨루에이션도 완벽하게 받아야 했다. 그러나 호시절도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바나나리퍼블릭 오더가 2005년부터 해외로 슬금슬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즈음 무역부에서 조심스레 “수출오더가 당신네한테 가격이 안맞아 해외로 빼는 것이니 그에 맞춰 공장 규모를 줄여라”고 귀띔했다. 물론 해외로 공장을 옮겨보라는 제의도 있었다. 시기적으로 늦었다고 생각했기에 거절했다. 국내 봉제가 아무리 어렵다고 이 정도 공장 못 꾸려가겠나 싶었다. 그러나 오더 빠져 나간 자리는 너무나 컸다. 힘든 시간이 이어졌다. 무역부에서는 2008년 11월경, 2009년 5월까지만 작업할 수 있는 물량을 채워 주었다. 6개월 앞서 공장 운영에 대한 결심을 굳히라는 뜻이었다. 2009년이 되면서 오더들이 정말 썰물처럼 해외로 빠져 나갔다. 바나나리퍼블릭 오더도 전량 인도네시아로 나갔다. 공장 시작 후 또한번의 위기였다. 2009년 초에 직원들에게 조만간 공장 문을 닫겠다고 공표했다가 번복하기도 했다. 벼랑 끝에서 때마침 내수 오더인 ‘아디다스’를 만난 것이다.

아디다스는 당시 85%는 수입 판매이고 15% 정도는 국내에서 디자인을 개발해 생산했다. 바로 국내 생산분 오더가 연결된 것이다. 결코 양이 적지 않았다. 그때 연결된 오더가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나나리퍼블릭 오더 급감으로 인원을 50명으로 줄였는데 아디다스 오더가 늘어나기 시작해 또다시 인원을 100명으로 충원했다. 생산설비도 트레이닝복에 맞게 과감하게 투자했다. 포켓웰팅기와 다꼬, 삼봉, 패턴 모양 제작기 등 특수 장비를 들여왔다. 당시 넘쳐나는 아디다스 홈쇼핑 물량을 처리하느라 정말 바쁘게 일했다. 그렇게 230평 공간에서 쭉 가동해 오고 있는데 이번엔 건물주가 공장을 비워달라고 했다. 마천동 인근에는 공장 용도로 쓸 그만한 공간이 없었다. 성남 쪽으로 눈을 돌렸다. 옛날 에스콰이어 공장 자리가 월세가 1천만 원에 나와 있었다. 어차피 300평 넘게 키울 생각이었기에 월세가 부담스럽긴 했으나 성남으로 달려가 나름 시장조사를 했다. 그러나 공단 내 인력구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또한 아파트형 공장이 대거 들어서서 인력난을 부채질했다.
성남은 어렵겠다 판단이 섰다. 그러던 차에 지금 있는 이곳에 부지가 나와 매입을 했고 곧바로 공장을 신축했다. 봉제공장 용도로 짓다보니 3층인데도 16인승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편리하게 작업물을 이동시키기 위해서다. 전 층에 LED등을 달아 조도를 높였다. 그러나 양질의 아디다스 오더도 그리 오래갈 것 같지 않음을 감지했다. 2013년 11월에 입주했으니까 이제 3년이 됐다. 그 과정에서 오더가 조금씩 해외로 빠져 나가더니 이제는 확 줄었다. 아디다스 본사에서도 “한국 가격이 안맞으니까 밖에 가서 박아 와라”고 한국에 통보한 것이다. 또 견뎌보면 오더가 영 없지는 않을 것도 같은데 한편으로는 아디다스도 오더가 없을 정도인데 다른 오더는 있겠나 싶은 생각에 부분작업 공장으로 전환해 볼까, 목하 고민 중이다.

양승국 대표를 만나 생산현장을 둘러본 뒤 차한잔을 놓고 마주앉아 나눈 얘기의 전부다. 그는 오더가 이어진다면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봉제업이기에 몸이 움직일 때까지 일을 놓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만큼 봉제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그러나 그는 자가 건물에 입주해 길게는 10년, 짧게는 5년은 봉제를 할 것이라 계산했었다. 아디다스 오더를 감안한 것이다. 그 5년이 앞으로 2년 밖에 안 남았는데 예상보다 빨리 아디다스 오더가 줄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것이 ‘부분작업’이라고 했다. 패턴 모양 제작기를 비롯 포켓웰팅기 등 고가의 특수 재봉기를 놀리기 보다 부분작업이 필요힌 공장을 찾아 함께 살아 갈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보자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앙승국 대표는 재봉기를 비롯 봉제주변기기에 대해서도 해박하다. 더불어 생산라인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배열해 생산 효율을 높이는 등 봉제생산 내공도 깊다. 앞으로 그가 생각하는 ‘부분작업 전문공장’은 또 어떻게 전개해 나갈지 자못 궁금하다. <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