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초여름 어느날, 패션브랜드 ‘창신사(昌信社)’ 런칭파티가 서울 종로구 익선동 한옥 뜨락에서 펼쳐졌다. 사람들로 넘쳐났다. 4백 명이 넘게 찾아와 관심과 축하를 해주었다. 말랑말랑하고 달달하고 멋스런 이름을 달고 나온 패션브랜드가 지천인데 ‘昌信社’라니? 아무튼 예스러운 브랜드 네임 그리고 투박한 브랜드 로고에 다들 눈이 번쩍 띈 표정이었다. 의아해하던 사람들은 파티가 이어지는 동안, 디지털 세상의 피로감을 날려 줄 아날로그적 향수가 묻어나는 ‘昌信社’에 정감을 표하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지난 10월 어느날, 2018 S/S 패션 트레이드쇼, ‘제너레이션 넥스트 서울’에 참여한 디자이너 브랜드 ‘20th Century Forgotten Boy Band’의 미니 패션쇼가 DDP 내 갤러리문에서 열렸다.
이 브랜드 역시 ‘昌信社’ 런칭에 참여한 디자이너가 공을 들이고 있는 브랜드다. 이 날 무심한 듯 절제된 느낌의 룩을 선보여 참석한 국내외 다수 바이어와 패션디자이너들의 오감을 자극시켰다. 브랜드 홍수 속에서 살아 남기란 가히 하늘의 별따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수를 자아내는 브랜드 컨셉으로 런칭파티를 진행하고 자신들의 브랜드를 당당히 런웨이에 올려 패션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이들은 누굴까?
바로 ‘昌信社’ 브랜드 런칭과 패션쇼를 주도적으로 이끈 이는 이학림과 손호철 디자이너, 그리고 두 디자이너가 소속해 있는 (주)낙산패션의 우병오 대표가 이 모든 이벤트를 전방위적으로 묵직하게 지원하고 있었다. 이렇듯 오랜세월 봉제임가공을 해오면서 자체브랜드의 꿈을 착실히 실현시켜 온 우병오 대표의 창의적 마인드가 궁금해졌다. 그를 만나기 위해 종로구 숭인동에 소재한 (주)낙산패션 봉제현장을 찾았다. 모처럼 맞닥뜨린 생산현장이다. 활기가 넘쳐난다. 귓전에 와닿는 재봉기음이 무척이나 반갑다. 사무실 안에도 검품 대기 중인 완제품 청바지가 가득 쌓여 있다. 빨간 후드를 눌러쓴 이학림 디자이너가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사장님은 인근에서 때늦은 식사 중인데 금방 올라 오실 겁니다” 그러고는 다시 디자인이 펼쳐진 모니터로 눈길을 가져갔다. 이내 우병오 대표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반색하기 보다 멋적은 미소로 수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영락없는 경상도맨이다. 경북 영주가 고향인 그는 중3 겨울방학 때 누나를 만나러 잠시 상경했다가 우연찮게 봉제와 연을 맺게 되었다고 했다. “집안 형편상 공고를 가야 할 것 같아 누나와 상의하기 위해서였죠. 당시 누나는 창신동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공장이 엄청 바쁠 때라 공장에서 잔 심부름을 요청해와 근 한 달 간 일했는데 누나에게 공장 생활이 마음에 든다고 했어요.”
졸업하러 고향에 내려간 우병오는 졸업하자마자 곧장 서울로 돌아왔다. 1986년 3월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걸 일찌감치 눈치 챈 그는 일부러 공장 일이 맘에 들었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주위에서 미싱 보다는 재단을 배우라고 권했다. 재단 일을 배울 요량으로 왕십리에 있던 원아동복 공장에 들어갔다. “물건이 새벽에 시장으로 나갈 때였죠. 곤히 자다가도 새벽 2~3시 쯤이면 형들이 깨웁니다. 4층 공장에서 커다란 옷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비몽사몽 계단을 내려와 차에 실어야 하는데 어린데다가 경험도 없다보니 여러번 계단에 꼬꾸라지기도 했죠. 그렇게 몇 년 하니 열여덟살이 되어 있더군요.” 재단을 배우려고 들어갔던 원아동복에서 겨우 칼 잡는 법만 익혔을 뿐 3년을 그렇게 막 일만 하다가 그만뒀다.
동대문 통일상가에 있는 남성복 공장으로 옮겨와 비로소 봉제기술을 익히게 된다. 당시 통일상가 매장에선 ‘한 철 벌어 서울에 집 한 채씩 산다’고 할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 덩달아 봉제공장도 쉴틈 없이 바삐 돌아갔다. 그는 이곳에서 재단도 배웠지만 다림질(시아게)도 배웠다. 완성 일을 하면서 검품사로도 일했다. 본봉, 오버록, 인터록도 기본적으로 익혔다. 어린 나이에 시작한 공장 생활이다. 퍽이나 고단했을 터. 통일상가 남성복 공장에서 몸을 뺐다. 부산으로 내려가 가구 일도 해봤다. 하릴 없이 빈둥거려도 보았다. 그렇게 한동안 봉제와 거리를 두며 방황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을 겉돌며 얻은 결론은 역시 ‘봉제’였어요. 봉제야말로 내가 가장 자신있는 있는 분야라는 걸 알았어요. 2006년, 독립을 결심했어요. 보증금 1천만 원에 월 80만 원으로 37평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딸아이 이름을 따 ‘수정사’란 간판을 걸었죠. 이후 법인으로 바뀌면서 (주)낙산패션이 된 겁니다.” 우병오 대표의 봉제 행보는 이때부터 속도가 붙었고 방향도 분명해졌다. ‘동대문을 대표하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목표가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나아갔다. 보문동 집을 나와 숭인동 회사로 출근하면 8시 반이다.
현장 상황을 파악한 뒤 곧장 도매상가로 향한다. 매장을 둘러보며 미팅을 끝내고 다시 공장으로 복귀한다. 그 시간에 맞춰 들어오는 샘플감은 일단 외부 패턴실로 보낸다. 자체적으로 패턴을 만지다 보면 반나절을 까먹기 십상이다. 투입된 원단을 확인한 후 재단작업에 들어간다. 이미 밖은 어둑해졌다. 이때쯤 패턴이 다 되었다고 연락이 온다. 패턴을 받아 2시간 정도 후다닥 샘플을 만들어 시아게(마무리, 다림질)집으로 보낸다. 이 모든 과정을 확인한 후에야 우 대표는 집으로 향한다. 고단한 하루가 그렇게 끝나지만 우 대표는 오늘도 즐겁다. 뚜벅이 걸음이지만 목표를 향한 걸음수을 줄였기 때문이다.
우 대표가 잠든 시간에도 그의 흔적은 멈춤이 없다. 시아게를 끝낸 샘플은 밤 11~12시쯤 매장으로 전해진다. 매장에서는 밤시장을 찾은 도매 고객들 눈에 잘 띄게 샘플을 마네킹에 걸어 둔다. 이들 눈에 들어야 주문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대문 인근 봉제공장들과 도매상가들 사이에는 보이지는 않으나 파이프라인이 이어져 소통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힘들더라도 끊김없이 반복만 되면야 좋지요. 일감이 계속 들어오는 거니까. 이 시스템이 작동을 멈추면 하루든 이틀이든 대책없이 쉬어야 하는 게 이 바닥의 고민이랍니다.”
= ‘창신사’ 가 추구하는 미래
K패션하면 기본적으로 ‘창신사’란 브랜드가 떠오르게끔, 동대문 국민브랜드로, 편하게 부담없이 사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겠다. 중간 유통을 줄이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 ‘창신사’ 브랜드네임, 로고에 대한 생각
호불호가 극명하다. 싫어하는 분들은 제 주위에서 봉제하는 분들이다. 뭐 촌스럽게 ‘창신사’냐고 한다. 반면 젊은 친구들은 의외로 호응이 좋다. 옛 ‘태극당’ 느낌도 떠올리고, 왕자표 고무신의 느낌도 들고… 창신사 로고 밑에 숫자는 회사 전화번호다. 옛 간판을 보면 항상 아래에 전화번호가 있었다. 거기서 아이디어를 따왔다.
= 자르고 박고 다리고, 살피고
앞으로 공장이 커지더라도 생산은 직접 다하는 걸로 갈 것이다. 바느질은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게 다르다. 다림질을 오래 하다보니까 가장 자신있는 게 검품이다. 다림질하는 사람이 오염부터 봉제상태, 포장에 이르기까지를 다 살피게 된다. 옷이 잘 나오고 안 나오고는 마무리 검사 즉, 검품사의 판단에 달렸다.
= 봉제임가공 공장과 패션디자이너가 한솥밥
단순임가공에서 한발짝 도약하기 위한 선택이다. 나름 5년 전부터 계획한 게 있다. 브랜드를 갖는 꿈이다. 우연찮게 기회가 찾아왔다. 판은 내가 벌이겠다. 나는 여기서 봉제공장의 볼륨을 키울테니 당신들은 여기를 징검다리 삼아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키워라, 디자이너들이 소프트웨어라면 봉제공장은 하드웨어다. 의기투합하게 된 이유다.
= 지난 10월 DDP에서의 미니패션쇼에 이어 2탄?
내년 봄에 계획 중이다. 쇼 제대로 준비하려면 미리 샘플링과 사진촬영 끝내고, 단가 다 뽑아 놓고, 바이어 초대까지, 꼼꼼하고 밀도있게 기획해야 한다는 사실을 학습효과를 통해 알았다. 지난번 쇼는 남성복 위주였다. 이학림 디자이너가 남성복을 선보였으니 내년 봄 쇼는 손호철 디자이너 위주로 여성복을 선보이게 될 것이다.
‘다소 촌스러운 이름과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모습으로 누구든 편히 집어 들 수 있는 브랜드’를 주창하며 손을 맞잡은 두 디자이너(이학림, 손호철). 이들의 생각을 묵묵히 지원하는 우병오 대표. 향후가 주목된다.<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