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시 소재, 26년째 침구류 전문 생산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주)단장의 이선국 대표를 만나본다. <편집자주>
인간의 일생에서 수면이 차지하는 시간은 상당하다. 그래서 안락하고 평온한 수면의 중요성은 말할 나위 없으며 침장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주)단장은 고급 침장류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업체다. 동사의 이선국 대표는 이 분야에 뛰어든 후 26년 째 화려하고 고급스런 침실 문화를 창출하는 역할을 해오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가난하고 힘들었던 세월을 온 몸으로 헤쳐온 역사가 숨어있다. 가난한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난 그는 서울 종로 대학로 인근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이일 저일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일하며 성장기를 보냈다. 신문배달부터 소위 ‘아이스께끼’ 장사까지 돈이 되는 일은 마다하지 않았다. 여름철 아침 일찍 아이스께끼 한 통을 채우고 나가 저녁에 다 팔고 돈을 받았는데 또래 다른 친구들보다 수완이 좋아 다 파는 날이 많았다. 당시 받는 돈이 300원 가량이었는데 집안 살림에 쏠쏠한 보탬이 될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성장 과정 때문에 이대표는 장사를 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장사해서 돈을 벌어 가난을 탈출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 그에게 동네 지척에 있는 동대문시장은 꿈을 실현시킬 동경의 공간이기도 했다. 상고를 졸업하고 직업 전선으로 뛰어들어 시작한 일이 동대문 시장에서 양복지를 판매하는 업체의 매장직원이었다. 맞춤복이 성행하던 시절이라 양복지 판매점이 동대문에 많았다. 처음 잡은 직업이었지만 양복지 판매는 이대표가 합류했을 무렵 거의 끝물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기성복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기업에 양복지를 공급받던 도매 상사들이 어려워지고 연쇄적으로 소매점들도 타격을 받게 되면서 어음 거래가 많던 당시에 부도나는 업체들이 속출했다. 이대표가 몸담았던 매장도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한 지인이 출판사 수금 사원을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해왔고 망설일 것도 없이 그길로 이직을 했다. ‘S영어사’라는 유명 영문 시사 월간지를 발행하던 회사였는데 구독료 수금을 하는 일이었다. 판매한 물건 값을 받는 일이어서 크게 어려울 것은 없었다.
별 어려움 없이 2년 정도를 다니다가 회사에서 영업쪽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 월간으로 발행되는 잡지의 구독자를 확보하는 영업이었다. 당시에는 영어 교육 교재가 별로 없어서 이 잡지가 영어공부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인기가 있었다. 주로 대학생, 대기업 사원, 영어 교사들이 많이 구독했다. 영업 파트로 옮겼지만 누구하나 영업 방법을 알려주는 이는 없었다. 오로지 스스로 뛰고 터득하는 것이 방법이라면 방법이었다.
이대표는 이 영업을 10년 동안 했다. 처음에는 명문대 위주로 다녔다. 그러다가 차츰 영업을 넓혀간 것이 수도권의 중고등학교 영어, 일어 등 외국어 과목 교사들이었다. 서울 시내 소재한 학교를 대상으로 영업이 어려웠던 것은 대부분의 학교가 수위실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다행히 경기 등 수도권 학교들은 수위실이 없어 교문을 통과하기가 쉬웠다. 오라는 데가 아닌 곳에 가서 영업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몇 년이 지나니 노하우가 쌓이고 영업도 제법 잘해 생활할 수 있을 만큼 벌었다고 한다. 수도권을 돌다보니 차량 이용이 필수였다. 그러나 보험들 돈이 없어 항상 조심하며 다녔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거나 혹은 너무 더운 날은 아예 쉬었다. 남들보다 영업을 못하지는 않았지만 큰 돈을 벌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직장을 다니면서 사내연애 끝에 현재의 부인을 만나기도 했다.
키도 훤칠하고 양복지 영업을 했던 감각이 있어 늘 몸에 잘 맞는 양복을 입고 일을 했던 그는 꽤나 인기가 있었다. 출판사 영업사원 일을 10년 하다가 전환점이 왔다.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손인 그에게 얼마 되지 않지만 유산 상속이 이뤄졌다. 집안에서 대대로 살던 부산집이 도로에 수용되면서 보상금이 나왔던 것이다. 일부는 친척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것으로 뭘 할까 궁리하고 있는데 막내 동생 친구가 마침 경기도 구리시에서 이불공장을 하고 있었고 동생에게 이불 판매 영업을 해보라고 권유하는 일이 있었다. 침구류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주변의 권유로 유산으로 남은 돈을 의미 있는 곳에 쓰기 위해 이불 공장을 차렸다.
평생 장사를 해왔기 때문에 판매하는 것은 자신 있었고 사람 상대하는 일에도 이력이 나 있었기 때문에 공장 설립하고 근로자들 관리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아예 모르는 분야도 아니고 지인들이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내릴 수 있었던 결정이었다. 처음 시작은 경기도 구리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재봉기 4대로 출발했다. 침장 쪽 디자이너와 막내 동생 친구인 재단사 등 몇 명을 데리고 공장을 가동했다. 판매 영업은 오로지 이대표의 몫이었다. 처음 공략한 곳은 역시 동대문과 광장시장 일대였다. 첫 출발이었으니 외상은 줄 수 없고 팔고 수금하고 다시 만들어 팔았다. 92년에 첫 출발을 시작한 침구 공장은 이대표의 노력 덕분에 조금씩 성장했다. 그러다가 97년도 IMF 사태가 왔다. 도매상들이 부도를 맞고 판매점들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기 일쑤였다. 다행히 IMF는 그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원단 값이 갑자기 치솟았다. 물론 침구류 가격도 덩달아 올라갔다. 그런데 이대표는 침구류 가격이 올라간 상황에서 원단 업체들에게 어느 시점까지는 가격을 올리지 말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갭을 활용해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이미 만들어놓은 침구류 가격은 오른 값으로 받고 결제해야 할 원단 가격은 그대로 묶어놨기 때문에 그 만큼 이득이 생겼다. 결국 IMF는 성장의 기회가 되었다. 창업 시점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당시 침구문화가 큰 변화를 맞고 있을 무렵이었다.
특히 분당 신도시가 생겨나면서 요를 깔고 자던 문화에서 침대문화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또한 경제성장으로 가처분 소득이 높아지면서 침장의 고급화가 확연하게 두드러지고 있을 시점이었다. 고급 침대문화의 확산이 회사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고 이대표는 회상한다. “저가 제품보다는 중고가 제품을 주로 만들었던 것이 주효했습니다. 침대가 대중화되면서 고급 침대커버 수요가 증가했고 우리는 대부분 고품질 고가 제품 위주로 개발에 주력한 것이 성공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무난하게 성장해왔지만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임대해 사용하던 공장 때문에 2번이나 큰 곤혹을 겪기도 했다. 처음 공장을 설립하고 입주한 곳은 보증금 500만원에 40만원짜리 지하 공장이었다.
침구 공장은 바닥이 더러우면 안 되기 때문에 바닥재를 깔고 표면에 니스칠까지 해서 공을 들였다. 그런데 공장 천정에서 물이 새는 일이 발생했다. 건물주에게 이야기하니 공장을 비워야만 공사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국 이전했다. 바닥 공사에 공을 들였지만 물과는 상극인 침구류의 특성상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옮긴 공장 역시 바닥에 공을 들여 공사해 놓았지만 어느 날 바닥이 울렁거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보온재를 깔고 비닐 장판을 깐 바닥 안쪽은 이미 물이 새어나와 물바다나 다름 없었다. 결국 건물주에게 이야기해서 지상층으로 옮겨갔다. 임대료를 그대로 받는 조건으로 옮겼는데 지상층으로 옮겨가고 보니 수년간 지하에서 생활하다 새로운 세계를 만난 듯 좋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시 공장을 옮길 수밖에는 없는 상황이 왔다.
자수를 외주로 맡겼는데 한 달에 평균 800만원 가량 비용이 지출되었다고 한다. 아예 자수기를 자체적으로 확보해 내부에서 처리하면 1년이면 자수기 가격은 뽑겠다는 계산이 섰다. 그런데 문제는 공간이었다. 공장에는 다두 자수기를 넣을 만한 공간이 없었다. 결국 공장을 다시 옮겼다. 월세가 260만원 가량 하는 공장이었다. 이후 월세를 내느니 자체 공장을 짓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에 구리시에다 어렵게 자금을 모아 신축했다. 그 후 구리 공장을 임대주고 지금의 남양주 공장으로 새로 지어 오게 된 것이 약 3년 전이다. 지금 단장의 연매출은 약 50억원 가량 된다. 처음에는 상호가 ‘하나로’였지만 지금은 ‘단장’으로 변경해 보다 고급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대표는 항상 정직하게 만들고 제대로 판매하는 것을 강조한다. 제대로 만든 제품을 제 값에 파는 것이 당연한 논리지만 실제 쉬운 일은 아니다.
거래처에서 단장 제품이비싸다고 이야기할 때 그는 왜 비싼지 충분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제대로 된 원단을 사용하고, 봉제를 깔끔하게 하고, 제품을 깨끗하게 관리하는데 제값을 못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전국적으로 단장 제품은 고급품으로 인식되어 그 이유로 찾는 매장이나 소비자들이 많다. “제가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거래처를 발굴하기 위해 갔더니 다들 이 어려운 시기에 왜 사업을 시작했냐고 하더군요. 그 다음해에 갔더니 지난해보다 장사가 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또 그 다음해 갔더니 지나간 해가 좋았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러면 매년 안 좋아졌고 그 세월이 20년이 훌쩍 넘었는데 그 업체들은 다 망했을까요? 그렇지는 않더라고요. 일부는 문을 닫았고 또 일부는 여전히 어렵다는 말을 입에 달고 영업하고 있습니다. 그런 반면 크게 성공한 매장도 있습니다. 결국 마인드의 문제입니다. 어렵다고 비관만 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그 가운데서도 성장하는 매장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 기간 동안 성장해왔고요. 결국 성공의 요인은 얼마나 적극적인 자세로 성실하게 임하는가에 달려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인터뷰 | 이상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