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봉제인 | 박미숙 | 다온패션 대표

“열다섯에 ‘봉제’ 만나 쉰아홉 되고보니~”

열다섯 꽃다운 나이에 상경했다. 교복이 그리웠을 소녀가 낯선 서울에서 ‘봉제’를 만났다. 친구들이 ‘학생’으로 불릴 때 사람들은 그녀를 ‘공순이’라 불렀다. 설움을 삼켜가며 억척같이 일했다. 한 달에 고작 두번 쉬는 것도 감지덕지였다. 하루 열두시간 넘게 미싱을 돌렸다. 그렇게 청춘을 흘려보냈다. 지금 그녀의 나이 쉰아홉. 이제 사람들은 그녀를 ‘박 사장’이라 부른다. 44년 차 봉제인생을 살고 있는 봉제장인, ‘다온패션’ 박미숙 대표의 이야기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동대문으로 향했다. 전철 1호선 동대문역 1번 출구를 나와 뒤돌아 열 발자욱만 떼면 오른쪽으로 골목이 나타난다. 종로구 창신동 봉제골목 시작점이다.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다. 차와 오토바이 그리고 사람들은 복잡한 길을 묘기 부리 듯 잘도 오간다. 기자 역시 자주 드나드는 골목이라 익숙하다. 창신동다운 풍경이다. 곧장 200여 미터를 걸으면 창신종로약국 사거리. 사거리에서 살짝 좌회전 했다가 오른쪽으로 틀면 창신4가길이다. 번지를 붙여 ‘647봉제골목’으로도 불린다. 전봇대와 담벼락에 나붙은 안내판이나 아스팔트바닥에 그려진 문양만 봐도 단번에 알 수 있다. 바로 봉제소공인들의 삶의 터전으로 특화된 골목이란 사실을.

이 골목의 끝에 ‘이음피움 봉제역사관’이 위치해 있고 박물관 열걸음 못미쳐 ‘실빛빌딩’ 지층에 토탈 여성복 생산업체인 ‘다온패션’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봉제골목의 일감은 동대문패션타운의 경기와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동대문시장 상인들은 반토막 매출에 늘어가는 빈 점포를 보고 있자니 하루하루가 힘겹다. 이런 동대문시장에 젖줄을 대고 있는 인근 봉제소공장들의 사정 또한 불보듯 뻔하다. 약속시간에 맞춰 ‘다온패션’을 노크했다. 작업장에 들어서자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소나무그림에 시선이 멎었고, 연신 ‘드르륵’ 대는 미싱음이 경쾌한 리듬의 행진곡처럼 귓전에 와 닿았다. LED 등으로 시공된 실내는 흡사 깔끔한 의류 매장처럼 환하고 밝았다.

찢어진 청바지와 갈색 머리가 잘 어울리는 여장부

“어서 오세요” 박미숙 대표가 직원들 틈에서 불쑥 일어나 기자를 맞았다. 그의 패션스타일이 범상치 않다. 브라운색으로 염색한 커트머리에 찢어진 청바지 그리고 튀는 컬러의 블라우스. 밝고 활기찬 그의 표정과 잘 어울렸다. 공장 역시 그를 닮아 밝고 활기찬 모습이다. 쉼없이 돌아가는 미싱音을 피해 옆건물에 있는 창신데님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마주앉았다. “재봉기를 비롯 주변기기를 더 들이고 싶은데 보시다시피 공간이 협소해요. 현재 15명이 이 공간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러니 별도 사무 공간을 두기 보다 기계 한 대를 더 놓게 되지요.”

박미숙 대표가 창신동 봉제골목에 합류한지는 5년 남짓. 그 전에는 한성대 앞 삼선교 인근에서 17년 정도 공장을 운영했다. 중국 오더를 받아 한 6년 정도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다가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중국 오더에 직격탄이 떨어졌다. 급하게 내수시장 오더를 잡으려고 동분서주 해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거래처라는 게 그렇잖아요. 어느날 갑자기 찾는다고 뚝딱 잡아지는 게 아니죠. 일감없이 직원들과 근 3년을 버티다보니 그때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공장을 포기하기는 싫었어요. 그렇게 힘들 때 전 서울봉제산업협회 차경남 회장을 만났어요. 여러가지 아이디어도 주시고 제가 만든 옷에 칭찬도 아끼지 않았지요.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17년 머물던 곳을 떠나 5년 전 창신동 봉제골목에 둥지를 틀었다. 이는 곧 본격 시장제품에 몰두하겠다는 각오이기도 했다. 새로운 다짐의 의미로 회사명도 ‘영주패션’에서 ‘다온패션’으로 변경했다. “회사명은 힘이 되어준 차경남 회장이 ‘다온패션’을 제안했고 ‘모든 좋은 일이 다 온다’는 뜻을 지닌 순 우리말이라 냉큼 접수했습니다. 1997년에 공장을 차렸으니 독립 24년차네요. IMF 위기로 나라경제가 어수선하던 시절이라 남들은 사업을 접을 때였지만 저는 ‘영주패션’이란 간판을 달고 공장을 시작을 한 겁니다.” 그의 고향은 충남 서천이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 때 고향을 떠나왔다. 아버지는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며 아픈 가정사를 힘들게 끄집어냈다. 어머니 혼자서 6남매(2남4녀)를 거두려니 벅찰 수밖에. 집안 형편은 궁핍했다.

“설날이 되면 서울로 돈 벌러 갔던 동네 언니들이 설쇠러 고향을 찾죠. 며칠만 지나면 졸업장을 받을 수 있는데도 아버지께선 설 쇠러 온 언니들을 따라 서울 가서 돈 벌어 오라 하셨지요. 졸업도 못한 채, 종로구 원남동에 있는 옷공장에서 서울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억에 참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아는 언니 따라 온 거라지만 결국 혼자잖아요. 누가 누굴 보듬어 줄 처지가 못되고,,, 밤늦게 공장 일 끝나면 대충 기레빠시 쓸어낸 공장 바닥에 눕죠. 곧바로 곯아 떨어질만큼 일이 힘들었습니다. 7~8명이 공장에서 침식을 하기에 새벽 당번이 있었어요. 일주일에 한번씩 순번이 오면 미싱 일도 서툰데 연탄불에 아침밥까지 지어야 했어요. 시골에선 구경도 못했던 연탄불이라 행여 꺼트리기라도 하는 날엔 온갖 핍박을 견뎌내야 했어요.”

숱한 역경을 ‘내 공장’으로 보상받다.

그러던 중 열일곱살에 폐결핵이 찾아왔다. 어린나이에 가뜩이나 제대로 먹지 못한데다가 장시간 섬유먼지에 노출된 탓이다. 요양을 위해 잠시 시골집에 내려갔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여전했다. 어린 딸을 위로하기는 커녕 몹쓸 병을 옮아 왔다며 도리어 구박했다. 당시 시골집에는 네살과 여섯살 터울의 두 여동생과 열살 차이 나는 막내 남동생이 살고 있었다. 어차피 집안 형편으로 볼때 동생들도 학업을 이어갈 수 없겠다 싶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서울로 데려와 봉제기술을 익히게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지금 두 여동생은 15년 가까이 제 공장에 있다가 지금은 각자 봉제공장을 꾸려 독립했고 청각장애가 있어 늘 아픈손가락인 막내 남동생은 제 공장에서 일을 돕죠. 어쩌다보니 가족 모두 봉제밥을 먹고 있네요.” 자신의 의지대로 택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느순간 욕심이 생겼다. 누가 옆에서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눈치껏 배우고 익혀야 했다.

“미싱보조로 일할 때 미싱 밟는 선배 언니들이 부러웠어요, 자릴 비우면 슬쩍 앉아 미싱을 돌려보다가 혼나기 일쑤였지요. 제가 눈썰미가 좋고 손놀림이 잽쌌나 봐요. 그렇게 혼나면서 기술을 터득했어요.” 빨리 기술을 익혀야겠다는 욕심이 앞서 지겹단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어느정도 일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자 ‘내 공장’ 욕심이 더해졌다. 결국 열다섯살에 봉제를 만나 서른한살에 ‘내 공장’ 꿈을 이뤄냈다. 독립을 하게된 계기는 IMF가 터지기 전, 일본 브랜드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직원으로 일할 때의 인연 때문이다.

“女사장이었는데 제품 자체를 엄청 꼼꼼하게 따지고 검품이 까다로웠어요. 일하고 때 되면 월급 받는 수동형이 아니라 책임감 있게 일하는 능동형의 저를 그분이 잘 봤던 거 같아요. IMF가 닥치자, 공장 정리를 결심하면서 제게 제안했어요. 독립해 볼 마음이 있으면 일감을 밀어주겠다구요. 뒤늦게 나를 따라 서울로 와 봉제일을 하는 동생들 생각이 났어요. 내 공장이 있다면 동생들과 함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주저없이 결심했습니다.” 다온패션의 주거래처 매장은 동대문 제일평화, DDP패션몰(구, 유어스) 등에 있다. 생산 품목은 니트를 뺀 여성복 토탈이며 남성복은 재킷류만 한다. 5년 전 창신동으로 이전해오면서부터 거래를 시작해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이거 못해! 복잡해! 힘들어! 다른데 알아봐!

“거래처 사장과는 사업 가치관이나 마인드가 잘 맞아요. 제가 만든 옷이 매장에서 잘 팔리는 게 우선입니다. 그러자면 잘 만들어야죠. 잘 만든다는 건 뭡니까? 꼼꼼하게 성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대충대충 만들면 하루살이 밖에 안되죠. 가끔 인터넷쇼핑몰에서 옷을 사는데 한심한 경우가 더러 있어요. 디자인과 사이즈만 보고 구입하죠. 그러나 막상 입어보면 핏이 틀려요. 모델들이 입었을 때의 핏과 같을 리 없죠. 그럼 저는 거의 직접 수선해 입어요. 어떨 땐 바느질이 너무나 허술해요. 봉제밥 먹는 제가 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저품질이 많아요. 저희야 기술이 있어 고쳐 입는다지만 일반 소비자분들로선 한 철 밖에 입을 수 없으니 분통 터질 일이지요. 제 입장에서 보면 답답하죠. 이런 식의 엉터리옷을 일부에서 만드니 우리 모두가 도매급으로 몰리는 겁니다. 엉터리 옷은 한번으로 끝납니다. 연속적 판매 될 리가 없지요. 박음질만큼은 제대로 해주자는 게 제 철칙입니다. 덕분에 코로나 비상 시국임에도 불구, 아직까지 일감 걱정은 하지 않아요.”

이렇듯 ‘성실함’을 무기로 잔뼈를 굵힌 덕에 그와 인연을 맺은 거래처는 믿고 맡긴다. 대면 상담이 필요없다. 실제로 5년을 거래해 온 매장 사장을 스치듯 한번 만난 게 전부라고 했다. 중간에 디자이너만 오갈 뿐이다. “몇몇 공장 사장님들은 디자이너들이 디테일 많은 옷을 가지고 오면 ‘이거 못해! 다른데 알아봐!’란 말을 자주 합니다. 조금만 공정이 까다로우면 ‘복잡해! 힘들어! 안해!’라고 퉁명스레 내뱉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보겠다’라거나 ‘이런 부분은 공정을 조금 빼는 방향으로 가자’라고 제안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인드와 상담 자세의 교정이 필요해요. 디자이너의 면도 살려주고 또한 봉제의 스킬도 높일 수 있게 말이죠.”

박미숙 대표는 의류패션을 공부하는 청년들을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의류제작 경험이 부족한 대학생들과 봉제장인을 연결해 패션쇼를 진행하는 행사다. 이들은 봉제장인의 지도를 받아 주제에 맞게 옷을 제작하게 되는데 바로 박 대표가 봉제장인 자격으로 교육에 참여했던 것. “배우려는 욕심들이 많아요. 생각도 많고요. 기술은 파고 들어야 하고 욕심을 부려야 해요. 재단만 해주면 쪽을 이어붙이는 식의 단순 작업에서 벗어나 옷의 흐름과 모양을 생각하면서 박음질을 하고 완성품의 느낌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만드는 게 중요해요. 응용력과 상상력이 요구되지요. 이들을 지도하면서 느낀 점입니다.” 구로공단이 빵빵하게 돌아가던 70~80년대, 미싱사들은 산업역군으로 불렸다. 여공들의 여린 손끝에서 만들어진 옷과 가발은 수출효자품목이었다. 산업화시대를 살아온 그가 요즘 ‘봉제’에 아쉬움을 이야기했다.

“봉제와 염색은 한때 우리나라가 최고였죠. 지금 어떻습니까? 이제 중국산이 우리 것 못지 않아요. 기술로 다 따라잡았죠. 원단도 중국에서 공급 안해주면 우리 옷 못 만들어요. 레이스, 단추 등 모든 부자재도 마찬가집니다. 지금 상황이 그렇습니다. 5월 초 중국 노동절 연휴 때 중국산 원단을 받지 못해 이곳 공장 태반이 쉬었어요. 물론 한국산이 있지만 가격대가 너무 차이 나 쓸 수가 없어요. 만약에 수가 틀려 한국에 원단 못준다 하면 이 바닥 공장 올스톱 된다고 보면 됩니다. 해외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면서 일찌감치 모든 기술노하우를 중국을 비롯 동남아 현지에 고스란히 넘겨준 결과인 거죠.”

그녀는 ‘기러기족’이다. 남편은 고향인 전북 순창으로 귀농해 두릅농사에 푹 빠져 산다. 아들 며느리도 시골이 좋다며 그곳에 직장을 잡고 내려갔다. 홀로 봉제 냄새가 물씬하게 밴 창신동 봉제골목을 지키고 있다. 주 6일을 봉제와 씨름하다가 일요일 하루는 가까운 산을 찾아 나선다. 가끔은 가족이 있는 순창도 다녀온다. “한국화장품에 근무하던 남편이 50대 초반일 때 한참 명퇴 붐이 일었죠. 스트레스를 무척 받길래, 그만두고 봉제공장에 들어오라고 했어요. 겨우겨우 설득해 결국 한 5년 같이 호흡을 맞춰 봤는데 안되더라구요. 그 뒤로 자기 사업 해본다고 움직이다가 여의치 않자, 귀농을 택하더군요. 귀농한지 벌써 13년 됐네요. 그 양반은 인생을 참 즐겁게 살아요.” <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