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제,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강북패션협회가 지난 2021년 9월 결성되었다. 서울 강북구는 봉제업체가 많은 지역이다. 지역 특성과 업계 발전 방향에 대해 동 협회 이명철 회장을 만나 보았다.
<편집자주>
Q. 강북패션협회 설립의 이유는 무엇인가?
강북패션협회 창립 이전에 서울 성북구를 비롯해 타 지역에서 성격이 비슷한 봉제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중심이 되는 단체가 있어 회원사간의 의사 소통이 활발하고 봉제업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지자체나 정치권 등과의 활발한 교류가 진행되고 있었다.
반면 강북 지역은 영세 봉제업체가 많은데 반해 조직적인 체계가 갖춰지지 않아 업계가 한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었다. 특히 지자체의 예산도 타 지역에 비해 열세였다.
강북구 지역에 패션협회가 꼭 필요한 이유가 있다. 이곳은 업종별로 가장 많은 것이 바로 봉제다. 봉제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서울 외곽지역인 탓에 운수업이 많다. 그 뒤를 이어서 요식업이라고 한다. 그만큼 강북 지역은 봉제업의 비중이 높은데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변변한 조직이 없었다. 봉제업이 많은 서울의 다른 구에는 대부분 협회나 조합이 활성화되어 있다.
그러나 강북구에만 이런 조직이나 협동조합이 변변치 않아 강북패션협회를 지난 2021년 9월 결성했고 지난해 1월 여러 외부인사를 초청해 본격적인 설립 기념식 개최하고 출범했다.
Q. 협회의 주요 활동은 어떤 것이 있나?
협회 결성 1년이 겨우 지났지만 짧은 시간에도 많은 활동과 성과를 냈다. 협회 결성 후 총 9번의 행사와 봉사활동을 진행했다.
특히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비롯해 업계 활성화를 위한 행사 등 정신없이 달려왔다. 패션협회가 활성화되기까지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협회 활동이 탄력을 받기 위해서는 지자체를 비롯해 정치계, 관계 기관의 도움이 절실하다. 다행히도 신생 협회와 이들과 연결해주신 고마운 분들이 주변에 많았기에 비교적 빠른 시일내 안착할 수 있었다.
우선 협회는 지역내 봉제업체들이 정부지원 사업을 받을 수 있는 방향과 방법을 모색해주는 일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이를 통해 일감창출, 활로개척 등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노력 중이다. 또한 가업승계 사업도 활발히 진행 중인데 협회 내에서 다양한 지원과 노하우 공유 등을 통해 도움을 주고 있다.
Q. 협회 활동에 제약이나 어려움은 없나?
강북구는 서울의 중심에서 벗어난 외곽 지역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외곽 지역이다보니 개발도 더디고 건물의 공실률도 높고 임대료도 저렴하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다보니 서울의 도심이 개발되면서 그 지역에 있던 공장들이 강북지역으로 이전해오는 사례도 많다. 저 역시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강북구 지역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봉제업종은 사실 지자체 입장에서는 특별하게 대응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업종별로 가장 많은 수를 가진 봉제업을 활성화시키고 그와 관련된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자체의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강북구의 재정자립도가 타 지자체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점이다. 타 지자체에서 서울시나 정부가 일정 정도 재정을 분담하는 사업도 강북구는 재정 여력 때문에 못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서울시나 정부가 70%, 구가 30% 부담하는 지원센터 같은 시설 설립도 재정이 없어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른 지자체들은 쉽게 쉽게 지원시설이나 각종 혜택을 받고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좀 안타깝다.
Q. 솔루션앵커를 비롯해 봉제업지원센터가 강북구에도 가동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봉제업 지원을 위한 시설이 있으나 실질적인 도움은 받지 못하고 있다. 솔루션앵커는 서울시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협회에서 운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사실 이런 시설들이 관내 동마다 한 곳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자체별로 한 두 곳 가지고는 실질적인 도움이 안된다. 전국적으로 분포한 지원시설의 주요 업무 가운데 공동재단실이 그나마 활용도가 높은 편이다.
그러나 이 시설 역시 꼭 필요한 때 사용하기는 쉽지 않다. 예약하고, 기다리고, 왔다갔다 하다보면 그냥 내 공장에서 처리하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시설을 더 늘려서 좀더 쉽고 빨리 일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공장 입장에서 재단실만 잘 활용해도 재단사 1명 인건비를 줄일 수 있는데 얼마나 이득이겠는가.
그리고 현재 솔루션앵커나 지원센터에서 진행하고 있는 각종 사업을 봉제업에 꼭 필요한 사업으로 재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불필요한 교육 사업은 확 줄이고 여기에 소요되는 예산을 봉제생산에 필요한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재 지원시설의 주요 사업 중 하나가 교육사업이다. 한가지 예로 들면 봉제실습 교육을 통해 봉제인력양성사업을 대부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이 교육을 받고 봉제현장에 취업한 사람이 과연 몇명이 있는지 묻고 싶다. 관련 시설의 요청으로 실습교육 신청자 면접을 본 적이 있는데 솔직히 그 사람들 중에서 봉제현장에 취업을 목적으로 온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단순 취미 활동이나 여가 생활, 그리고 호기심으로 신청한 사람들이 많았다.
기술 배워 취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런 것이 불필요한 낭비라는 것이다. 그 비용을 차라리 봉제공장이 생산에 필요한 쪽으로 써야 한다. 제가 볼 때 현재 7:3 정도로 봉제공장 생산 지원 외적인 분야로의 예산 지출이 높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Q. 협회 활동 이후 꼭 해보고 싶은 사업은?
청년주택이라는 사업이 있다. 청년들의 주거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추진한 사업인데 저는 청년창업공간이라는 사업을 제안하고 싶다.
단순히 주거가 아니라 청년들이 패션봉제를 통해 스타트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자는 것이다. 적정 건물을 제공해주고 1층에는 전시판매장, 2층에는 공동작업장, 3층에는 마무리 완성 작업이나 사무실 혹은 인터넷 판매를 위한 시설을 두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층에 주거공간을 두고 가업 승계가 가능한 가족 공간을 제공하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청년들이 있어야 봉제업이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강북과 같이 기업이 적은 지역의 많은 건물들이 2~3층이 공실이다. 청년들에게 이런 공간을 지원한다면 좋지 않을까.
Q. 협회 수장 업무와 함께 주름의류 전문업체를 운영 중인데 소개좀 부탁드린다.
주름 분야에 뛰어든 것은 2015년 이곳 강북구에 새로 터를 잡은 이후부터다. ‘플리유’라는 자체 브랜드도 가지고 있다. 플리유는 여성복에서 남성복, 애견의류로 라인업을 확장하여 주름전문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지향한다. 현재는 공영홈쇼핑, 쇼핑엔티 등 온라인에서 판매되며 OEM 생산도 하고 있다.
주름 관련해 다양한 노하우와 특허를 바탕으로 친근한 디자인을 입체적인 주름으로 재해석해서 트랜드를 공감하고 표현하며 합리적인 가격을 추구한다. 봉제와 주름 가공 등을 자체 공장에서 모두 처리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어 우수한 품질과 최신 디자인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우리는 원단개발부터 재단, 봉제, 주름 판매까지 밸류체인의 수직계열화로 원가 절감은 물론 각 공정별로 전문가를 배치해 엄격한 품질 관리를 하고 있다. 특히 주름 관련 장비를 지속적으로 갖춰 나감으로써 최신 유행 디자인이나 새로운 유행의 주름 개발에 활용하고 있다.
Q. 봉제와의 인연이 깊은 것으로 안다.
9남매의 대가족 속에서 자랐다. 형제가 많아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상경했고 그 때 시작한 일이 봉제공장 재단실의 소위 ‘꼬마’일이었다.
1981년 즈음이었는데 당시에는 공장과 상가가 한 건물에 함께 있는 곳이 많았다. 재단실 꼬마부터 시작해 1년만에 재단보조로 올라갔다. 타고난 부지런함과 붙임성으로 선배들과 잘 어울리고 기술을 빨리 익힌 덕분이었다.
재단사라도 패턴을 익히지 못하면 반쪽짜리이기 때문에 새벽 5시에 (응암동)전문 패턴사에게 유료로 6개월 월급을 주고 개인 지도도 받았고 ‘라사라 복장 학원’패턴강좌도 다녔다. 노력의 결과인지 남대문시장에서 최연소 재단사가 되었고 타 상가 공장에서 늘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4년 정도 그 생활을 마무리하고 85년도에 군에 입대했다. 군 입대할 때는 다시 봉제 안하려고 배우던 패턴이나 관련 자료를 몽땅 불태우기도 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쉬는 날도 별로 없고 가끔은 임금도 제대로 안나올 때였다. 제대 후에 다시 봉제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봉제는 정말 쉬운 일은 아니었다.
Q. 다른 일은 생각해보지 않았나?
제대 후 다시 재단사 일을 시작했고 그 후 90년 초반 전세금 450만원으로 반지하 작은 공간에 공장을 얻어 보증금 200만원, 월세 25만원 공장을 설립했다. 방이 하나 딸린 공장에서 가족들이 함께 일하고 기거했다. 당시 공장이 참 잘되었다.
1991년도 남대문 ‘장띠상가’로, 1996년도에는 동대문 ‘디자이너클럽’으로 확장 이전하면서 공장 규모가 20배 이상 커졌다.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다. 이후에 임가공에 그치지 않고 이후 동대문 상가 일대와 명동, 지방 주요도시에 의류매장을 오픈했고 그 밖에도 다수 거래처를 확보해 규모를 넓혀갔다. 세상 부러울 것 없을 만큼 사업이 순조로웠다. 그러다가 넘치던 자신감으로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린 것이 큰 화를 불러왔다. 2002년도에 프로젝트파이넨싱(PF) 방식으로 경기도 광명시에 15층짜리 오피스텔 282세대 시행 사업에 손을 댔다.
그런데 이 사업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부동산 사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지만 뭐든지 성공할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앞뒤 재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더 큰 사업을 추진하게 되고 결국 제 자신이 잘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부동산 관련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부도 사태를 맞았다. 이 부도를 극복하기 위해 더 큰 부동산 개발 사업에 가진 돈을 모두 투자했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Q. 어떻게 극복했나?
재기가 쉽지 않았다. 2005년도에 중국 광저우로 이주하여 봉제공장과 그곳 상가에 매장을 열었다. 3년여 북경, 연태, 대련, 상해, 항주, 청도, 위해, 심천, 마카오, 홍콩, 항주, 이우, 주저우 외 많은 중국 내 도시를 전전하였지만 밑천 없는 상황에서 유의미한 사업으로 성장시키지 못했다. 결국 국내로 귀국했다. 중국 생활 3년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그 기간 동안 중국 시장조사가 충분히 되어 이후 다시 재기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2007년도 한국으로 돌아 왔을 때는 경제사정이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을 정도로 나빠져 있었다. 동대문시장 근처 신당동 고시원에 12개월 동안 거주했다. 가족들과 함께 기거해야 해서 방이 좁아 사우나나 거리 벤치, 지인사무실 등에서 잠을 잘 때도 많았다. 반노숙자 생활이었다. 그러다가 한 지인의 도움으로 동대문 상가에 매장을 열 수 있는 자금을 확보했다. 그 돈이 시드머니가 되어 지금의 재기를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곳에서 돈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팔았다. 패션 제품, 소품 심지어 커피까지 팔았다. 과거 문제가 완벽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노력 덕분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동안 가족들의 고생이 너무 컸다. 그렇지만 잘 자라준 애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제 자신이 나락까지 떨어져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고 싶을 때가 많다. 지금도 서울역 노숙자들을 찾아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다른 봉사활동을 마다하지 않는다. 연말에 다른 협회들이 송년모임 할 때 강북패션협회는 봉사활동을 했다.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임을 제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다.
Q. 향후 계획은?
봉제업이 굉장히 어렵다. 지금이 봉제업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 더 늦어지면 어렵다. 그래서 협회를 중심으로 단합된 활동이 필요하다.
정부 지자체의 지원 없이는 봉제업은 자생할 수 있는 기력이 없다. 봉제업 종사자들이 자주 소통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미래를 지키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