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이사람 | 박정사

다시 현장에서


‘검신기’를 아시나요?
검침기는 흔하게 들어보았지만 ‘검신기’라는 기계가 있었다는 것을 이 사람을 만나고 나서 알았다. 그 옛날 검신기라는 기계를 만들어 봉제공장에 설치했던 이가 박정사씨다. 우연하게도 그를 서울 관악구 소공인 패션봉제협업센터에서 만났다.

재주 많고 기술도 좋은  박정사씨는 동 센터에서 재능기부를 통해 공동작업장의 각종 재봉기와 주변기기를 관리하고 유지 보수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혹시 ‘박정사’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는 본지 1979년 5월호부터 1980년 10월호까지 ‘박정사 전자미싱교실’이라는 제목으로 기술강좌를 연재했다. 당시 국내에 전자제어 재봉기가 막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이다.

그는 60년대에 성동기계공고 조립과를 졸업했다. 공고를 나왔지만 변변한 기업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취업이 쉽지 않았다. 졸업생 가운데 5~6명 정도만 겨우 취업할 뿐 나머지는 대부분 갈 곳이 없었다.

집근처인 서울 성동구 행당동의 한 봉제공장에 취업했다. 조립과를 나왔기 때문에 재봉기를 수리하거나 유지 보수하는 일은 식은 죽먹기나 마찬가지였다.

기계식 재봉기를 주로 다루던 때였는데 당시 외국계 봉제업체들이 전자식 재봉기를 하나둘 갖춰가던 시대였다.

전자식 재봉기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독학으로 전자 관련한 공부를 시작했다. 열심히 공부한 덕분인지 생소한 분야를 팠던 까닭인지 모르겠지만 당시 미싱기사 업계에서 박정사라는 인물은 일약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재봉기 업계의 선두주자였던 당시 ‘부라더미싱’에서 그를 초빙해 자사의 미싱기사들을 모아놓고 전자 재봉기에 관해 강의까지 하는 수준으로 대접을 받았다. 차트를 그려서 전자 기판의 이해, 사용, 수리법 등을 설명했다.

그런 실력을 인정받아 본지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타이틀로 17회에 걸쳐 ‘박정사 전자미싱교실’이라는 기술 연재를 했던 것이다. 이 연재는 반도체나 다이오드의 기초 이해 등 다양한 기술적 자료가 실려 있다. 당시 이 기술 연재는 일반 미싱기사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강좌였고 충분히 이해하는 미싱기사들이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봉제현장 생산현황판을 최초로 만든 인물

박정사씨는 재주가 많은 탓인지 재산을 많이 모으기도 했고 기계 만들려고 많이 날려먹기도 했다고 한다.

봉제현장에서 흔히 보던 생산현황판을 최초로 만든 인물도 그다. 70년대에 최초 설계를 하고 직접 회로기판을 제작해 생산현황판을 만들었다.

필요한 부품은 일본에서 들여오고 납땜까지 직접 해가며 만들었다. 이 생산현황판은 실시간으로 실적을 파악할 수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인기를 끌었다. 생산현황판보다 더 획기적인 발명품이 앞서 언급한 ‘검신기’라는 장비이다.

지금은 사용이 엄격하게 금지된 기계인데 말 그대로 인체를 검사하는 장비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이 기계가 도입된 것은 봉제현장의 잦은 제품 밀반출 때문이다. 당시 봉제현장에서는 목표 수량보다 대략적으로 0.2% 정도의 초과분의 원단을 입고한다.

따라서 메리야스를 생산한다고 치면 2만장짜리는 약 400장 정도가 더 생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200~300장 정도가 모자라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그래서 몸을 검신하는 장비를 도입했던 것이다. 검신기는 사람이 지나가면 1/100초 정도의 짧은 시간에 맥박과 체온을 체크한다. 정상 맥박과 체온이 아니면 바로 부저가 울린다. 한편으로 보면 신체가 아닌 심리를 검사하는 장비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장비가 도입된 이후에는 생산물량이 정상적으로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목표 수량을 넘기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공장의 오너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검신기 개발 이후 많은 공장에서 주문의뢰가 있었고 정신없이 바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검신기는 이후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봉제현장에서 사라졌다. 그는 80년대 중국의 어느 공장에 설치한 이후 더 이상의 검신기는 만들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하는 장면이 있어요. 지방의 어느 내의류 공장이었는데 검신기를 설치한 첫 날이었어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검신기 통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줄선 사람들 밑으로 내의가 여기 저기 떨어져 있었어요. 그 공장도 그날 이후로 수량이 정상적으로 나왔다는 후문을 들었습니다.”

검신기 뿐만 아니라 재주 좋던 그는 내의류에 사용되는 쌍침 바이어스 랍빠도 만들어 전국에 보급했다. 시중에서 1,500원 하던 랍빠였는데 그는 5,000원에 판매해도 사람들이 찾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시중 랍빠는 폭을 25㎜ 정도로 넓게 잘라야 원하는 사이즈가 나오는데 그의 랍빠는 18㎜로 잘라도 사이즈가 정확하게 나왔기 때문에 원단 절감 비용을 감안하면 훨씬 이득이었던 것이다.

 

해외 봉제현장 경험, 재능기부로 보람

박정사씨는 재봉기나 각종 기계 장치 개발이나 유지 보수일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공장 설계나 기초 설비 분야의 전문가이기도 하다. 해외 여러 나라에서 공장 설계일도 하고 공장 유지 보수 일을 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봉제라인의 재봉기판을 15도 틀어서 배치한 아이디어를 처음 실현시킨 것도 그다. 요즘도 봉제공장 중에는 15도 틀어서 작업판을 배치한 공장들을 더러 볼 수 있다.   

80년대 도미니카로 건너가 일했고 90년대는 중국의 대련, 칭다오, 위해 등지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는 약 10여년간 인도네시아의 한 공장에서 일했다. 2020년 설 명절을 쇠려고 국내에 귀국했다가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은퇴 아닌 은퇴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다시 나가지 못했는데 사실 나이도 있고 해서 일을 그만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하게 협업센터가 생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내가 할 일도 있겠구나 생각하던 차에 센터장를 찾아가 재능기부 의사를 밝혔지요. 마침 센터에서도 제가 하는 역할이 꼭 필요했던 차였습니다. 여기는 특종도 많고 주변기기도 많아요. 이런 장비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사실상 활용하기가 어려워요. 저는 대부분 다뤄본 기계들이니까 별 어려움이 없어요.”

무보수의 재능기부지만 그는 센터의 유지보수 업무가 즐겁다고 한다. 최신 장비들이지만 여전히 자신의 기술로 충분히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