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평 공간에 부품 보관하는 캐비넷 2개 놓으면 앉을 자리도 변변찮은 작은 매장이었어요.” 80년대 초, 을지로 4가(지금의 창경궁로)의 대로변에서 한 블록 들어간 골목길의 한 허름한 식당 2층에 태우미싱상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매장이라 해야 취급 부품을 보관하는 캐비넷 2개가 전부였던 그야말로 ‘학고방’ 같던 곳이라고 (주)태우정밀의 박종봉 대표는 이야기한다. 이 매장이 1982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친형이 하던 가게를 박 대표가 물려받은 곳이었다.
태우정밀의 시작은 그랬다. 지금은 국내 봉제 관련 분야 라벨, 각종 텍스타일 자동 절단기를 비롯해 타 산업분야까지 합치면 100여종 이상의 큐텍스(cuTex) 브랜드로 관련 제품을 생산하는 절단기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출발은 뒷골목 2층 3평짜리 매장이었다. “봉제기기 업계에 몸 담기 전에는 생필품 유통업에 잠시 몸담았어요. 당시 큰 행운을 잡을 뻔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건 내 길이 아니었어요.” 처음부터 봉제기기 관련업에서 일하지는 않았다. 업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생필품 유통업에 종사했다.
70년대 중후반 국내에 슈퍼마켓이라는 형태의 소매점이 태동하던 시절, 박 대표는 소매점에 물품을 납품하던 회사에서 일했다. 당시 시기상으로 절묘한 때였는데 무엇보다 슈퍼마켓이 막 생겨날 즈음이었고 부가가치세라는 제도가 막 시행될 무렵이었다. 몸 담았던 회사는 서울 시내의 140개 업체 중 약 70%인 100여개 업체를 거래처로 확보하고 있던 곳이었다. 당시 8톤 트럭 한 대분을 슈퍼마켓에 납품하면 10만 원의 수입이 생기는 그야말로 대박 사업이었다. 비누 등의 생필품을 만드는 공장부터 슈퍼마켓, 그리고 회사, 이렇게 삼각 거래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어음 결제가 많아 할인도 하고 현금으로 싸게 구매하면서 여러 가지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창구가 많았다.

박 대표는 회사에도 이익이고 거래하던 슈퍼마켓도 좋고 여기에 제품을 만드는 공장까지 서로 이익인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래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시대상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인데, 그 시스템을 만들고 돈만 벌어들이면 되는 찰나에 큰 악재가 생겼다. 몸 담았던 회사가 큰 불이 나는 바람에 모든 물품이 잿더미가 된 것이다. 결국 8톤 트럭 10대분 정도를 유통시키고는 회사가 폐업하는 바람에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 후 내의류 업체의 서울 영업소 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형님의 권유로 봉제기기 전문거리였던 을지로4가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불안했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봉제업계로 발을 딛고 보니 뭔가 확실한 내 것이 있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형으로부터 매장을 물려받았을 때 아무래도 든든한 버팀목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형이 이민 가기 전, 버팀목이 될 확실한 아이템 하나를 요청했다. 당시 오리엔트 바늘이라는 환편직 바늘 쪽에 유명했던 업체가 막 봉제바늘을 출시했고, 형은 그 브랜드의 대리점을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오리엔트 바늘은 당시 대표적 바늘 브랜드인 오루강 바늘에는 눈엣가시였다. 점유율은 높지 않았지만 신생 봉제바늘이 시중에서 움직이자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오루강은 대리점을 제안하며 오리엔트 바늘과의 거래를 중단하라는 제의를 하게 되었다.

오루강 바늘 대리점 따기가 정말로 어려웠던 당시 이 거래로 박 대표는 든든한 버팀목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 후 형은 미국으로 떠났다. 3평 남짓 작은 사무실에서 당시 인기 있던 재봉기 바늘 대리점 타이틀은 얻었지만 먹고 살기 빠듯할 정도였다. 남이 하지 않은 품목으로 아이템을 늘려가지 않으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었다. 그 때 눈에 들어온 것이 실을 나눠 감을 수 있는 와인더였다. 당시 와인더는 일본에서 전량 수입되었는데 정작 수입업자는 잘 팔지 못했고 대부분을 태우미싱상사에서 판매했다. 와인더를 국산화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큰 맘 먹고 와인더를 만들었으나 결과는 대실패였다. 만들고 보니 무겁기도 무겁고 조금만 써도 기름이 새는 등 고장이 자주 나는 통에 1년을 하고는 두 손 들고 말았다. 와인더 국산화를 포기하고 1년여를 보내다가 어느 날 ‘이 정도를 못 만드나’ 하는 오기가 슬슬 발동했다. 결국 제대로 한 번 만들어보자며 주먹을 굳게 쥐고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엔 주먹구구가 아닌 처음부터 기술적인 부분은 전문가를 초빙해 맡겼다.
개발환경은 변변치 않았다. 매장보다 조금 더 큰 작은 공간을 근처에서 빌려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샛별와인더’가 탄생했다. 샛별은 큰딸의 아명이다. 출시하자 와인더의 인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몇 대 팔리겠지 했던 예상을 뛰어넘고 당시 봉제공장의 필수 장비로 자리 잡았다. 소량 다품종이 대세화되어 색상이 다양해지면서 실을 나눠 사용해야 하는 공장이 늘었기 때문이다.
샛별와인더를 보유하지 않은 공장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워질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와인더의 인기 몰이로 협소한 공장에서 더 이상 생산하기 힘들어 결국 망우리로 공장을 확장 이전하였다. 이렇게 태우정밀이 86년에 탄생했다. 초창기 망우리 공장에서는 와인더를 비롯해 펀칭기 등 몇 가지 품목을 만들었다. “몇 번의 난관이 있었는데 불과 기름에 관련된 것입니다. 특히 불은 제게 고통도 주었지만 많은 교훈도 주었고, 기름도 큰 고통을 주었지만 결국은 전화위복이 되었어요.” 박 대표는 큰 시련도 몇 차례 겪었다. 하나가 무역하던 친구로부터의 부도였고 다른 하나가 다니던 회사의 화재, 그리고 1995년도에 발생한 을지로 매장 화재사건이다. 첫번째 시련은 유류파동 직후, 당시 무역 업무를 잘 아는 친구와 물품 대금을 받으면 그 친구의 통장으로 들어가고 자신은 어음을 발행하는 식으로 협업을 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어려워지면서 부도를 내고 말았다. 당시 부도로 7천 4백만 원 가량의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직원이 10여명 있었는데 회사가 부도를 맞았는데도 사직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속으로 골병이 들어가면서 한 1년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그렇게 1년여를 고생했는데 유류 파동을 서서히 극복해나가기 시작하던 무렵부터 이상하리만치 영업이 잘되었다고 한다. 부도를 맞은 후 1년 만에 그 손실을 다 만회하고도 남았다.

그 후 회사는 비교적 순탄한게 흘러갔는데, 1995년 태우미싱상사 매장이 옆 공장에서 발화된 불로 전소되는 사고가 터졌다. 부품을 비롯해 관련 제품으로만 약 3억 원대의 피해를 보았다. 당시 공장을 짓기 위해서 모아두었던 3억 원을 다시 제품 확보하는데 몽땅 쓸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공장건립비로 3억 원을 모아놓지 않았더라면 아마 엄청 어려운 상황을 맞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화재 당시에 주변에서 십시일반 도와주었던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을지로 4가 일대에서는 유명한 ‘샤일록’이라는 별명을 가진 동료업자는 통장까지 들고 와 회복한 후에 갚으라고 내놓을 정도였다. 눈물겹게 고마운 일이었다며 당시 도움을 준 이들의 마음은 자신의 수첩에 세세히 기록해 두고 지금까지 갚아오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책상 모서리에는 당시 화재 모습과 날짜(95. 11. 15)까지 적은 사진을 유리 안쪽에 꽂아 두고 있다. 그 사진은 항상 정신 차리라는 자신에 대한 채찍으로 삼는다고. “요즘은 전기, 전자, 의료, 인쇄 등 타업종에서도 큐텍스 인기가 좋아요. 예전에는 우리 브랜드가 컷(Cut)과 텍스(Tex)의 조합이었지만 이제는 업종이 늘어나 컷(Cut)과 엑셀런트(Excellent)라고 소개해요.”
봉제공장이나 자수공장 치고 태우정밀 기계 한두 대 없는 공장이 없듯이 지금까지 30년 동안 히트작도 많았다. 와인더, 펀치, 컷터기, 심지어 빵빵이까지 다양한 아이템이 있지만 그 중 효자품목으로 꼽으라면 역시 ‘TC-38 스마일니트테이프컷터’라고 한다. 이 제품은 니트공장에서 각종 테이프감을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기계인데 처음 만들었을 때는 이렇게 히트를 칠 줄 몰랐다. “이 제품도 샛별와인더처럼 처음 만들어놓고는 최소한 몇 대는 팔리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게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꾸준하게 팔리는 우리 회사의 효자 품목이 되리라고는 그 때는 생각지 못했어요.” 스마일컷터의 인기를 증명이라도 한 듯 동사의 생산현장에는 유독 다른 제품보다 이 제품의 완성된 포장박스가 많이 쌓여있다.

그리고 스마일컷터를 비롯해 샛별와인더 등 동사의 오래된 모델의 생산현장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여전히 활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요즘 태우정밀은 봉제용 컷터류뿐 아니라 다른 산업분야에서도 기기 의뢰를 많이 받는다. 생각지도 못한 분야에서 의뢰가 오기도 하는데 벽 데코용 종이 타일이나 냉장고 부착용 자석 절단, 의료용 튜브 절단, 심지어 반도체 분야에 들어가는 필름 절단까지 태우정밀 절단기의 적용분야가 상당히 늘어났다. 동사 매출 구조가 이제는 봉제 분야와 타 산업용 분야가 약 50: 50 정도라고 한다.
한 때는 봉제분야보다 전기 전자 의료 등 타 산업분야의 매출이 더 많을 때도 있었다. 특히 모바일 액정용 필름 절단 장비는 관련 업계에 상당히 많이 보급했는데 매출 확대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액정 절단 장비의 경우 대당 가격이 5천만원대에 이른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순탄하게 왔습니다. 최근 2년 정도 매출 신장이 주춤했지만 그 전까지는 계속 완만한 상승 곡선을 이뤘어요. 30년 이상 이렇게 순탄한 성장을 한 것에 대해 저는 제 능력 이상의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고객은 물론 임직원 등 주변에 두루 고마울 따름입니다.” 올해 태우정밀은 설립 30주년을 맞아 직원 가족 동반 해외여행을 다녀올 계획이다. 5년 마다 한 번씩 전직원 해외여행을 진행했던 사내 행사의 하나로 올해도 역시 11월 중으로 실시할 예정이다. 직원들의 복지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박 대표의 책상 한 켠에는 생일을 맞아 직원들이 마련한 화환이 놓여 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이 화환에서 서로 간 존중과 화합이라는 단어가 문득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