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가 아니라 ‘자고 나면 강산이 변한다’가 맞다. 그만큼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봉제생산기기의 발전 속도 역시 놀랍다. 재봉기를 비롯, 주변 기기명에 ‘자동’이란 말이 붙어다닌지 이미 오래이다. 급속도로 컴퓨터화 되고 스마트화 되더니 이제는 IoT(사물인터넷), 로봇화로 치닫고 있다. 고효율, 고품질, 고생산성을 위해 머리를 싸매가며 개발했고 또 사용자는 아낌없이 생산설비에 투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변하지 않은 게 하나 있다. 바로 봉제작업용 의자이다.
각목 혹은 철제다리로 된 길다란 의자, 바로 봉제 작업자(미싱사)들이 사용하는 의자다. 4~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깔고 앉는 방석이 미끄러져 내릴까 의자에 노끈으로 질끈 묶어놓은 모양까지도 세월이 멈춘 듯 그대로다. 작업자의 건강이나 편의성을 위한 배려는 도무지 없고 이에 대한 투자는 인색했다.
작업자의 건강이나 편의성을 위한 배려, 무신경
왜 그랬을까? 품질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생산설비 업그레이드에만 관심을 가졌지, 정작 ‘사람’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작업자의 편의는 늘 뒷전이다 보니 틈새 아이템이랄 수 있는 이런 의자에는 무신경했다. 개선해 보려는 업자도 나서지 않을 수밖에. 만들어 봐야 별로 관심 가져 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작업자(미싱사)들의 무관심도 한 몫을 했다. 여름이면 엉덩이에 땀이 차 방석을 빼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방석 두께로 높낮이를 맞춰 놓았기에 꾹 참고 견뎌야 했다. 작업 중 잠깐씩 허리를 펴보지만 받쳐주는 등받이가 없어 허리에 손을 올려 뒤로 한번 젖혔다가 다시 봉제작업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불편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러한 봉제 작업 현장의 현실을 더 이상 두고만 볼 수 없다며 팔을 걷어 붙인 이가 있다. 서울봉제산업협회 차경남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늘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을 주창하며 봉제현장 작업환경개선에 관심을 가져 온 그가 봉제작업용 의자를 개선해 보기 위해 오래 전부터 틈틈히 작업현장을 기웃거리며 작업자들로부터 불편 사항을 듣고 메모해 왔다. 이를 토대로 직접 도면도 그렸다. 그런 다음 제품화 해줄 곳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하여 인연이 닿은 곳이 (주)동양봉제기계(대표: 이순재)다. 벌써 1년 전의 일이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의자를 개선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차경남 회장은 “작업자가 점점 고령화 되어 가고 90% 이상이 여성들입니다. 오랜 세월 불편한 의자에 앉아 일해온 탓에 등이 휜 분들이 많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죠. 작업환경개선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작업자 건강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하지요.”라며 봉제용 의자의 개선 배경을 설명했다.이렇게 탄생한 신개념 봉제 의자는 본격 출시에 앞서 작업자들의 반응을 체크하기 위해 우선 몇몇 봉제공장에 샘플로 제공됐다. 4~50년 습관이 굳어버린 현장에서 새로운 의자를 쉬 받아 들일 수 있을까 걱정하며 현장을 찾았다. 사용 소감을 들어본 결과, 괜한 기우였다. 종로구 창신동 소재 숙녀복 공장에서 ‘프로조이’ 김기일 대표의 얘기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아직까지 봉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랄지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만성적인 허리통증에 대해 누구 하나 관심 가져 주질 않았어요. 하루 왼종일 앉아서 일하는 작업자들 허리라도 한번 편하게 해줄 수 없을까 하여 몇몇이 모여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의자를 개선해 보기로 한 겁니다. 우리 공장에서도 사용하고 있는데 다들 좋아해요. 허리를 뒤로 젖혔을 때 탄력이 있으면서 편하게 기댈 수 있어 매우 좋아하더군요. 앉아서 일을 하다보면 특히 여름철에 엉덩이 쪽에 땀이 차 고역이죠. 이를 해결키 위해 의자 밑에 무소음 휀을 장착해 시원한 바람을 뿜어줍니다. 작업자들 표정부터 달라졌습니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라며 정말 좋아들 합니다.”
이밖에도 깜짝 아이디어가 몇가지 더 있다. 요즘 대부분 공장에서는 과거처럼 선택의 여지없이 음악이나 라디오를 틀어놓지 않는다. 각자 이어폰을 스마트폰에 꽂아 음악을 들으며 일하기 때문이다. 의자에 붙은 보조 사물함에 스마트폰을 충전할 수 있도록 콘센트를 연결해 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또 테이블 위에 구별해 얹어 놓은 쪽가위나 드라이버 등 간단한 봉제공구가 진동에도 떨어지지 않도록 함을 칸막이로 나눴다. 의자의 쿠션장치에도 아이디어가 숨어 있다. “허벅지에 닿는 쿠션의 곡면을 인체공학적으로 처리해 장시간 앉아 작업해도 피로감이 훨씬 덜하다.” 샘플의자를 사용해본 현장 작업자의 전언이다.

더불어 작업자의 힘이 앞쪽으로 쏠리는 미싱 작업의 특성을 고려해 의자가 몸을 잡아줄 수 있게 입체형으로 설계하는 등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써서 제작했다. 또 하나, 과거 의자는 대개 높낮이 조절이 안되어 방석을 한 두개씩 포개 놓곤 했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의자 높낮이를 상하 8cm까지 간단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장치했다. 의자 하나에 이렇듯 복합적 편의성을 부여하다 보니 대당 제작 단가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점과 40~50년의 관행이 바뀔 수 있을까, 즉 수요가 있을까도 문제였다. 이러한 이유로 사용자 입장에선 간절한 물건이나 선뜻 제작에 나서겠다는 업자를 쉬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개발 아이디어를 낸 차경남 회장의 얘기다.
환경개선사업 품목으로 제안
“봉제주변기기 전문 제작업체인 동양봉제기계 이순재 대표를 만나 사정을 얘기 했더니 선뜻 응했습니다. 구세주를 만난 듯 기뻤죠. 그때부터 제작에 속도가 붙었지요. 수시로 제작 과정을 보기 위해 현장을 찾았습니다. 제작 단가를 염두에 두며 되도록 경량화, 단순화, 스마트화하면서도 작업자들의 제안은 다 담아내기 위해 정말 애를 썼습니다. 서너번의 설계변경과 수정을 거쳐 최근 드디어 완성품을 탄생시킨 겁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판단은 사용자의 몫이다.
현장 반응에 따라 재봉기별(오버록, 신발용)로 보조테이블의 모양과 크기를 달리한 모델도 상품화할 계획이다. 구두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일하는 구두공장에서도 의자 높이 조절과 보조판만 변경하면 사용 가능하다. 의상 관련 학과가 있는 각 대학교 실습실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학교 실습실은 공장이 아니라서 대개 보조 테이블 없이 플라스틱 의자가 전부다. 그러다보니 가위와 실 등 봉제 공구와 부자재가 작업물과 뒤엉켜 정리정돈이 안되는게 일반적이다. 보조테이블 역할까지 하는 실습실용 의자가 필요한 이유다. 한편 서울봉제산업협회 관계자는 동 품목을 서울시 환경개선사업 품목으로 제안했으며 현재 검토 중이라 했다.<車>